2015. 10. 10(토)
어제 저녁은 피사에서 피렌체 방향으로 차를 돌려 E76도로를 달려서 피렌체 외곽을 도는 A1 도로를 우회해서 A1도로를 달려 로마로 내려갔는데 달밤에 호텔을 못 찾고 헤매는 바람에 많이 늦었다. 오후 1시 반에 피사를 떠나 중간에 휴게소에서 이것저것 사고 쉬면서 왔다고 하지만 로마에 도착하니 7시 반이다. 4시간 예정에서 6시간 걸린 셈이다. 오늘은 날씨가 우중충하다. 오전에는 로마 시내 구경을 하고 오후에는 바티칸을 구경할 예정이다.
사랑의 도시 '로마'는 한마디의 말로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매력을 소유한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커다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는 옛 유적을 그대로 보전한 채 현대문명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관광객들에게는 소매치기와 좀도둑으로 악명이 높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매년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는 군사와 전쟁을 주관하는 신(神)인 마르스(MARS)와 인간인 레아 실비아(Rhea sivia)의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 레무스(REMUS)와 로물루스(ROMULUS)에 의해서 건국 되었다고 한다. 태어난 후 테베 강에 버려진 쌍둥이 형제를 암 늑대가 젖으로 키웠다고 전해지며,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와 같이 로마를 세운 시조로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테베 강 하류에 접해 있으며, 대부분 구릉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는 7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발전한 '영원의 도시'이며, 주요 산업은 관광업으로 연간 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로마는 여름에는 고온건조하고, 겨울에는 발칸 반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의 영향으로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기도 한다. 한국과 비슷한 기후를 가지고 있지만 한국보다 겨울이 좀 더 따뜻하다.
로마 콜로세움 앞에서 폼 잡은 마님
콜로세움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알려진 로마의 상징이며 거대한 원형경기장으로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콜로세움 주변(Piazza del Colosseo)은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등의 고대 로마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네로의 궁전의 뜰에 있었던 인공연못에 AD 72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80년에 완성된 대형 원형투기장 겸 극장이다. 생사를 겨누는 검투사와 짐승과의 격투기 등이 여기에서 개최되었고 80개 정도가 되는 출구에 5만 5000명도 넘는 관객이 입장할 수 있는 경기장이었다. 네로 통치시대를 영화로 한 영화 "쿼바디스"에서는 기독교도의 박해의 장소로 사용된 콜로세움 장면을 잘 보여준다.
고대 로마 유적지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최대지름 188m, 최소지름 156m, 둘레 527m, 높이 57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이다. 콜로세움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극장이었으나 근처의 네로 황제의 동상(콜로세우스)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거대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로살레와 어원이 같다는 설이 있다.(위키백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밀비오 다리에서 라이벌인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것을 기념해 세운 개선문이다. 콘크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을 통일한 황제이기도 한데, 수도인 로마를 버리고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기고 이름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렀다. 결국 자원을 동로마에 치중하면서 서로마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콜로세움에서 바라본 개선문과 포로 로마노의 모습, 저 멀리 티투스의 개선문이 보인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팔라티노 언덕과 아벤티노 언덕 사이의 움푹 파인 기원전 600년경에 목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타원형 광장으로 고대 로마 제국에서 가장 큰 전차 경기장이었다. 영화 벤허의 대전차 경기 장면을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진실의 입은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의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데 지름 1.5m로 원래 하수도 뚜껑이었다고 하는데,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연출한 곳이다.
우리 마님 오드리 될 뻔..
포로 로마노(Foro Romano)는 고대 로마의 유적지로서 베니치아 광장과 콜로세움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로"라는 뜻은 공공 광장이라는 의미로 또한 "포럼"이라는 말의 어원이 여기에서 생겼다고 한다. 상업, 정치, 종교 등의 시민생활에 필요한 기관의 모든 것들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었다.
포로 로마노는 6세기 무렵부터 293년에 걸쳐 로마의 중심지로써 로마제국의 발전과 번영 그리고 쇠퇴와 멸망의 로마 2,500년의 역사의 무대가 되었고, 중심이 되는 곳을 제외한 많은 건물들이 283년에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로 토사 아래에 묻혀 있다가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바실리카 에밀리아(Bcilica Aminlia)와 시저 신전(Templum Caesar), 원로원(Curia), 개선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치, 새턴신전, 바실리카 율리아, 베스타 신전, 베스타 신녀의 집의 흔적,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로물루스의 신전, 콘스탄티누스의 바실리카 등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있다.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바라 본 포로 로마노의 모습, 캄피돌리오는 로마의 일곱 언덕 중 가장 높은 언덕으로 로마 신화의 최고신이었던 유피테르와 유노의 신전과 로마 시청이 위치해 있다.
카피톨리니 미술관은 콘세르바토리 궁전과 누오보 궁전을 합친 것을 말한다. 두 궁전은 지하로 연결되어 있다. 15~18세기에 교황들이 수집한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베네치아 광장 앞에 있는 이 건물은 이탈리아를 통일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중앙에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과 건물 꼭대기 좌.우에 말 4마리가 끄는 전차에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타고 있다.
판테온은 그리스어 판테이온에서 유래한 말로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인 125년경에 재건되었고, 모든 고대 로마 건축물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 되어있고, 7세기 이후부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로마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돔 구조이다. 바닥에서 원형 구멍까지의 높이와 돔 내부 원의 지름은 43.3m로 같다.
판테온 앞의 카페에서 먹는 에스프레소와 이탈리아 아이스크림 젤라또가 맛있다.
현존하는 로마에서 가장 큰 분수인 트레비 분수는 높이 25.9m, 너비는 19.8m이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나폴리 궁전의 벽면을 이용한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술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1453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의 명으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1762년 교황 클레멘스 13세 때 니콜라 실비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재단장 되었다. 해신 트리톤을 중심으로 아래에 말과 함께 두 개의 해신 트리톤상이 있는데, 왼쪽은 격동의 바다를, 오른쪽은 잔잔한 바다를 상징한다. 중앙 트리톤 상의 좌우의 두 여인은 건강과 풍요의 여신을 상징한다.
이 분수의 물은 '처녀의 샘'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전쟁에서 돌아온 목마른 병사에게 한 처녀가 샘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샘을 수원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등 뒤로 동전을 던져 한번 던지면 로마를 다시 찾을 수 있고, 두 번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 번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다는 전설이 있다. 매일 3,000유로 정도 쌓인다고 하는데, 문화재 복원과 보호에 쓰인다고 한다.
스페인 대사관이 있어서 스페인 광장과 스페인 계단으로 불린다. 계단 뒤로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언덕위의 삼위일체 성당)이 보인다. 이곳에서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햅번이 젤라또를 맛있게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필 비가 오는 바람에 아이스크림을 못 먹었다.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 안에는 바티칸이라는 또 하나의 국가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곳은 전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이라는 성스러운 의미 외에도 미켈란젤로의 불굴의 명작인 "천지창조"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훌륭한 예술작품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이탈리아 미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바티칸 박물관 입구에서
바티칸 시티는 이탈리아 로마 시내 테베 강 서안에 자리 잡고 있다. 한번에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 베드로 광장 앞에는 흰색 선이 도로 위에 그어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와 바티칸을 구분 짓는 국경이다. 바티칸은 이탈리아가 19세기 들어 근대통일국가로 탈바꿈하면서 교황청 직속 교황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1929년 이탈리아와 교황청 주변의 지역에 대해 주권을 인정하는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영토 0.44㎢의 세계에서 가장 조그만 독립국이 되었다. 현재 바티칸의 영토권은 성베드로 대성당과 로마에 있는 성당과 궁전을 포함한 13개 건물, 로마 동남쪽 120km지점에 있는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의 교황 하계 관저에 국한된다. 영토 내에는 성 베드로 광장, 대성당, 교황궁전, 관청, 미술관, 도서관, 은행, 방송국, 인쇄국, 철도역, 우체국, 시장 등이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제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 보관되어 있는 르네상스 시대 조각 예술의 대표적인 명작품이다. 그의 많은 피에타상 중에서 최초의 것으로, 당시 로마에 체류 중이었던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빌레르의 의뢰로 만든 것이다. 이 피에타상은 유일하게 미켈란젤로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에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인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묘사한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생전에 만든 거대한 조각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완성을 끝마친 작품이기도 하다.
성 베드로 광장은 좌우 폭이 240m로 30만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다. 정면으로 대성당의 입구가 있고, 그 좌우로 반원형의 회랑에 4열의 그리스의 건축양식인 도리아 식 원주 284개가 서 있다. 각주가 총 88주로서 4열 종대를 이루어 회랑 위의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배경으로
성인상의 모습
그 윗부분에는 140명의 성인상이 장식되어 있고, 광장 중앙에는 서기 40년 카라칼라 로마 황제가 이집트에서 운반한 높이 25.5m, 무게 320톤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오벨리스크 양쪽에는 분수 2개가 있고 이 두 분수 사이에 대리석 바닥이 있는데 여기 서서 열 회랑을 쳐다보면 기둥들이 4주식 포개져 보인다. 이곳은 성 베드로가 순교한 곳으로 제 237대 교황 알렉산더 7세의 명에 의거 르네상스 건축가 베르니니가 완공한 곳이다. 광장에서 성당 입구 쪽으로 향하여 보면 왼쪽에는 바티칸의 우체국과 관광안내소가 있고, 오른쪽에는 교황 거소 등 일련의 바티칸 궁전이 보인다. 일요일이면 교황이 베드로 대성당 정면의 발코니에서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인사를 한다.
성 베드로 광장
성 베드로 대성당 정문계단 앞에는 성 바오로상과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성 베드로의 상이 보인다. 이 열주회랑의 생김새는 예수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본뜬 것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낸 형태이다. 성당 중앙의 대 '쿠로라'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으로 2중 구조로 되어있고, 이곳에는 교황의 제단이 있으며, 베르니니의 동 천개로 덮여 있다. 개장시간은 7:00-18:00(하절기 18:00)까지이며 복장은 노출이 심하지 않아야 한다. 성당 내부의 6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홀은 길이가 현관을 포함하여 211.5m이며, 천정높이는 45.44m이다. 대성당 중앙 끝의 창문에는 날개의 길이가 1.5m인 '성령의 비둘기'가 장식되어 있다.
미켈란젤로의 걸작인 베드로 성당의 돔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다. 돔 밑에는 모자이크로 된 4복음서 저자인 마르코, 루가, 마태오, 요한의 초상화가 네 방향으로 그려져 있다. 성당 돔의 위용에 압도되어 마르코가 들고 있는 펜은 길이가 무려 1.65m나 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작게 보인다고 한다. 베드로의 묘 앞에 꿇어앉아 있는 동상의 주인공은 교황 비오 6세이고 이 안쪽 상부에는 비둘기의 스테인드글라스, 그 아래에 베르니니의 거대한 '성 베드로 의자'가 있다. 성 베드로가 사용했다고 하는 나무 의자도 있으며 왼쪽 계단은 교황의 지하 묘로 향한다.
맨 처음 베드로의 무덤에 성당이 세워진 것은 서기 32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서이다. 당초에 세워진 바실리카 식 성당은 그 후로 1,200년이 지나 낡게 되자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217대 교황)에 의해 개축이 시작되었다. 공사기간 중 면죄부의 남발과 종교개혁 파동으로 공사가 부진한 적도 있었으나 미켈란젤로와 그의 제자들에게 의해 진행되어 마침내 1626년 11월18일 교황 우르반 8세 때 준공되었다. 1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미켈란젤로의 설계와 구상, 그 제자 델라 포르타와 카들로 마데르소가 옥상 돔과 성당 정면 부분을 완성함으로써 완공된 것이다.
피냐 정원(Pigna Courtyard or Pine-Corn Courtyard)은 1816년 Pirro Ligorio에 의해 만들어졌다. 거대한 청동 솔방울 분수가 있는데, 이것은 아그리파의 욕실에서 발견된 것이다. 천정화나 최후의 심판 등을 설명할 수 있는 샘플 그림이 걸려 있고, 내부에서는 가이드가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벨 베데레의 뜰(Cortile Ottagonale)은 관람객이 처음으로 통과하는 곳으로, 18세기에는 클레멘스 14세와 피우스 6세가 수집한 조각들이 놓여있었다. 바티칸 궁전의 전신인 이곳은 19세기 피우스 7세에 의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 뜰의 한 모퉁이에 라오콘상이 있는데 이는 16세기 초 콜로세움 부근의 티투스 목욕장 유적에서 발견된 대리석상으로 후기 헬레니즘 시대의 걸작이다. 두 아들을 구하려다 옆구리를 물려 고통스러워하는 라오콘의 표정과 섬세한 몸의 근육이 정밀하게 묘사된 작품이다. 하나의 돌을 깍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Laoconte)은 트로이 목마를 성 안에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던 사제이다.
그리스 시대의 대리석상들 중의 하나인 벨베데레의 토르소는 상반신이라는 뜻으로 머리와 사지가 없는 흉상이다. 아테네 사람 네스토레의 아들 아폴로니우스 작이라는 조각가의 서명이 새겨져 있고, 미켈란젤로가 카라칼라 목욕장의 폐허에서 발견했으며 해부학적으로 완벽하게 표현된 이 작품에 충격적인 감명을 받았으며, 교황으로부터 이 작품을 수리하라는 의뢰를 받았으나 감히 손을 댈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이라 사양을 했다고 전해진다.
강의 신 티그리스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기원을 상징하는 물의 신으로, 처음 발견됐을 당시에는 머리, 오른팔, 왼쪽 손 등 여러 부분이 잘려 나간 상태였는데 천재 미켈란젤로가 지금과 같은 상태로 완벽하게 복원했다고 한다.
아폴론은 인체의 완벽한 비율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데, 이 조각상은 1489년 안티오에 있던 네로 황제의 별장에서 발견된 2세기 중엽의 조각상이다. 아폴로가 활을 쏜 직후 날아가는 화살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잘려진 왼손에는 활을 들고 있다. 전 세계 수많은 작가에 의해 가장 많은 모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하다. 뒤태가 예술이라는데....
아폴론 상
아우구스투스 조각 상(우측)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 상
회화관(Pinacoteca)은 바티칸 박물관의 입구를 들어서 안뜰 오른쪽에 있다. 비잔틴시대부터 현대까지 종교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연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들 중 제8실에 있는 라파엘로의 걸작 마리아의 대관, 폴리뇨의 마리아, 그리스도의 변용은 꼭 관람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변용은 라파엘로의 최후 작품으로 아랫부분은 제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제9실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완성작 산 지롤라모 제12실에서는 마니엘리즘에 지대한 영향을 준 카라바죠와 그의 제자가 그린 그리스도 강가 등 찬란한 예술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변용
라파엘로의 방(Stanza di Raffello)은 궁전 오른쪽 2층에 있는 4개의 방이다. 라파엘로가 이 곳의 그림들을 그릴 당시 성 시스틴 성당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미켈란젤로가 교황과의 의견대립으로 피렌체로 귀향했을 때 라파엘로는 아무도 입실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스티나 예배당에 몰래 들어가 미켈란젤로의 예술 기법을 알아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이 방은 화재의 방, 서명의 방, 엘리오도로의 방,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으로 나뉘어 있다. 4개의 방 중 가장 아름다운 서명의 방에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라파엘로에게 의뢰하여 그렸다는 천장화를 볼 수 있다. 이 벽화는 라파엘로가 1508-1511 동안 심혈을 기우려 그린 것으로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지식과 도덕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그의 대표작 성체에 대한 토론 (1509 - 10년 제작, 너비 7.7m)과 철학의 승리를 그린 아테네 학파(1510년 제작, 너비 7.7m)도 벽을 마주보고 전시되어 있다. 엘리오도로의 방에 들어서면 오른쪽에서부터 레오네 1세, 아티라를 체포하다, 볼세나의 기적, 신전에서 추방되는 엘리오도로, 성 베드로의 해방이 차례로 걸려 있고 천장화로 아담과 이브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방은 4개의 방 중 가장 크다. 여기에는 라파엘의 제자인 줄리오 로마노가 그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시(미네르바 다리의 성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성체에 대한 토론
아테네 학파, 중앙에 붉은색과 푸른색의 의상을 입은 당대 아테네 학파의 거장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이 보인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정화 천지창조
(길이 36m, 폭 13m 등장인물이 300여명)
시스티나 예배당(Capella Sistina)은 궁전의 가장 뒤에 있으며 이곳은 교황 궐위 시 새 교황을 선출할 때 추기경들이 모여 선거하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1475년에서 1483년 사이에 건축됐다. 1473년 교황 식스티스 4세가 교황의 묘로 조성한 것으로 당시 보티첼리 페르지노 등에 의해 양쪽의 벽이 그려졌고, 그 후 율리우스 2세의 명에 의해 미켈란젤로가 천정과 나머지 벽화를 그렸다.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미켈란젤로는 1508년 5월 작업에 착수하여 4년 5개월 동안 정열과 창작력을 총동원하여 1512년 불후의 대작을 완성했다. 그가 천정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무리한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무릎에 물이 고이고 등이 굽었다는 유명한 일화에서 화가의 정열을 느낄 수 있다. 15세기에 대리석으로 만든 칸막이가 성당을 두 부분으로 분리시키고 있는데 제대가 있는 쪽은 종교행사를 위해 성직자들만 출입할 수 있고, 다른 한 쪽은 회의 등 행사 때 이용한다. 성당의 규모는 길이 40.23m 폭 13.41m 높이 20.73m이다.
천지창조 중 무녀 델휘카
벽화 최후의 심판이 정면에 있고 그 왼쪽은 모세의 일생 오른쪽은 그리스도의 일생이 그리스도와 모세의 일생을 주제로 하여 각각 6개의 벽화로 있다. 천정화 천지창조는 구약성서의 천지창조 일화를 주제로 빛과 어둠의 분리, 해와 달의 창조, 물과 땅의 분리, 아담과 이브의 창조, 원죄와 낙원으로부터 추방, 노아의 제물, 노아의 대홍수, 술 취한 노아 등 9개의 그림이 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한 미의 극치를 이룬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켈란젤로는 천장화 제작 이후 22년 벽화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되었다. 중앙에는 마리아와 성인들을 거느린 예수 그리스도가 준엄한 심판을 오른쪽에는 죄인들이 지옥으로 떨어져 간다. 그리스도의 발아래 성 바르톨로메오 의 모습은 비참함과 고민의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자화상 라고 알려져 있다.
최후의 심판은 수많은 등장인물을 통해 인간적 가치와 인간 존엄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역시 그 본연의 대상이 인간이어야 한다는 르네상스 정신과 통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원래 천지장조는 완전 나체로 그려져 있었으나 이 그림의 나체들은 후임 교황 비오 4세의 명으로 다니엘레 다 본테라가 손질하여 나체를 가렸다. 이 때문에 다니엘레 다 본테라는 '기저귀 화가'란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근래 천장화 천지창조 보수 원상태로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중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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