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3. 12
(아래 내용은 퍼옴)
199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비운의 국모 명성황후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명성황후 시해 백주기를 맞이하며
제작, 기획된 초대형 창작 뮤지컬이다. 명성황후는 조선의 마지막 황후이며 16세의 나이로 고종과 결혼하여 국사에 큰 역할을 하다가 일본인들에게
정책적으로 시해 당하는 인물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정국이 어수선하여 각종 난과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던 시절이었고 그 가운데 일본의 한반도 지배
정책에 반하는 의사를 강경하게 펼치다가 비극적 사건은 일어난다. 아무리 국가적으로 적대적 감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국가의 국모를 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건만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일본인들은 모든 역사적인 증거자료를 인멸해 버린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한일 간의 아픈 역사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한 나라의 국모였지만 한 남편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써 그녀가 겪었던 죽음과 만국공통의 정서인 애국심이
결합하여 국제적인 문화상품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문열 원작, 윤호진 연출로 1995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올리면서 큰 성공을 거둔
후, 약 십여 년간 수차례의 업그레이드를 거쳐 오늘 날, TV드라마와 뮤직비디오, 출판, 음반, 광고 그리고 코미디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문화 전반에 걸친 핵심코드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국내 공연문화 활성화와 해외 진출에 대한 초석 마련
<명성황후>는 1997년 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함으로써 한국 뮤지컬의 활성화와 해외진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당시 뉴욕 링컨센터 진출로 전회 기립박수와 「뉴욕타임즈」리뷰를 받으면서 좌석매진, 입석발매 기록을 세웠고 「뉴욕타임즈」로부터 ‘어떤
국적의 관객이건 감동받기에 충분하다’라는 평을 얻은 바 있다. 2002년 뮤지컬 <명성황후>는 런던 웨스트엔드에 진출하여 '용감한
도전'-「The Times」, '세계 수준' -「The Stage」 등의 평가를 얻어냈다. 현재까지 국내 각종 뮤지컬의 수출에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주면서 한국 뮤지컬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해내고 있다. 2006년 5월까지 총 694회 공연이 올랐으며, 국내외에서 뮤지컬
<명성황후>를 관람한 사람들은 모두 92만 명이 봤다.
놓치고 싶지 않은
명장면!
<명성황후>는 십여 년 동안 쉬지 않고
보완되어 온 작품이다. 98년 뉴욕 LA 투어 공연 때 새로 삽입된 무과시험 장면과 무당굿 장면 등은 가는 곳마다 찬사가 끊이지 않는
명장면이다. 런던의 인디펜던트로부터 한국의 아름다움을 흠씬 전한 의상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무대의상. LA 오베이션 어워드에 노미네이션 되었었으며
「뉴욕타임즈」로부터 신이 내린 빛과도 같다는 찬사를 받았던 조명. 이중 턴테이블로 마술과도 같은 무대를 창조했다는 런던의 이브닝 스탠다드의
극찬을 받은 무대. 명성황후가 결혼하는 초기장면부터 마지막 혼의 이름으로 부르짖는 피날레 곡 <백성이여 일어나라>에 이르기까지
<명성황후>는 오랜 시간 갈고 닦여진 빛나는 명장면들로 가득하다.
명성황후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황후로 본관은 여흥이며, 증영의정 민치록의 외동딸. 고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국정을 치르기엔 나이가 어려서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고 정치 실권을 잡게 되었다.
1866년(고종 3년)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이때 고종은 15세였다. 1882년 (고종 17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청의 힘을 빌어 대원군을 밀어내고
민씨정권을 수립하였으나 1894년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경장이 시작되어 친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의 추방을
기도하였다.
이듬해인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부임했으나 계속 이들을 견제하며 친러정책을 강화하자 일본인 낭인들이 8월 20일 궁궐을 침범하였고, 그 가운데 아다찌가 거느린 선봉부대의 흉인들에게 건청궁에서 난자당해 죽은 후 운반되어 소각되었다.
죽은 뒤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가 10월 복호되고 1897년 (광무 1년) 명성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이 해 11월국장이 거행되었다. 능은 양주의 홍릉이다. 명성황후는 1874년 (고종 11년)에 왕자를 낳아 2년 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그가 바로 순종이다.
1895년 (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갑오개혁을 통하여 깊숙이 조선 내정에 간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의 완전 제거를
위하여, 1895년 9월 6일 왕비시해 음모혐의로 전 내무대신 박영효에 대해 체포령을 내려 정계에서 축출하였다.이미 8월에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김가진(金嘉鎭)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다. 더구나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이에 일본측은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려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시해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에 있는
낭인(浪人)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安達]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安멎壽)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해산과무장해제,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어났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곧 새로
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정병하(鄭秉夏)·김종한·권형진(權瀅鎭)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였다. 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결국
을미사변은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어,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고, 일본의 식민지화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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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곡 2. 일본은 선택했다 - 미우라, 낭인들
제2장 제3장 제5장 제6장 제7장 제8장 제9장 제10장 제11장 제12장 제13장
명성황후 : 이태원 고종 : 오성원 대원군 : 남경읍 미우라 : 김법래 홍계훈 : 이상현 |
이태원 (명성황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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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드 음악대학 학사, 피버디 컨서버토리 석사 과정 이수. |
이상은 (명성황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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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UCSD(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Private Opera/Musical 과정 수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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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예술대학교 성악과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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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대학교 음악 대학 성악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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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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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성악과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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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피핀, 꽃전차, 아틀란티스2045, 애랑과 배비장,
뮤지컬<심청>, 뮤지컬<김삿갓>, 바리-잊혀진 자장가, 살을 빼고 싶은 돼지이야기,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가스펠,
미녀와야수, 애니깽, 외 다수 |
이필승(홍계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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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레미제라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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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
군대 가있는 아들놈을 빼고 마님과 딸래미를 데리고 오랜만에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말로만 듣던 명성황후를 보자고 마님이 재촉해서 마련한
자리이다.
공연을 기다리면서 마님과 함께
마님과 딸(코가 국화빵이네)
마당쇠가 이 무슨 건방진 표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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