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를 다녀와서
여행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우리집은 개를 3마리를 키우고 있어서 가족들의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
개를 다른 곳에 맡기면 개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서 한 번도 다른 곳에 맡겨 본 적도 없다.
여름휴가처럼 가족이 같이 움직일 때도 항상 개들이 함께 한다. 그래서 호텔이나 콘도처럼 개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불편한 곳을 이용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이번 여름도 당초에는 가꾸고 있는 텃밭에 가서 풀이나 깍고, 바로 밑에 있는 계곡에서 물고기나 잡고 저녁이면 불판에 돼지목살이나 구워서 소주나 한 잔 하면서 보낼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는 형이 회사에서 이용하고 있는 롯데관광을 통해서 유럽을 가자고 해서 그러자고 응해 놓고, 집사람한테도 미리 얘기를 하고, 고3인 딸애한테 엄마, 아빠 유럽 갔다 올동안 집 잘 치우고 개들 을 잘 돌보아 주라고 당부를 해놓았다.(참고로 휴학하고 군대있는 큰놈이나 둘째한테도 애들 학업 때문에 부모생활이 저당 잡히는 것은 우리집에서는 절대 없다.)
그러던 차에 형이 회사일로 갑작스럽게 갈 수 없다고 연락을 해왔다.
집에는 얘기 다 해놓고 참 난감하던 차에 매일 아침 보던 사랑밭새벽편지에서 실크로드를 간다고 하는게 아닌가?
얼씨구나 하고 미리 신청을 해놓고 집사람한테는 나중에 얘기를 했다.
유럽이 아니고 중국의 실크로드를 가니 그리 알고 준비를 하라고 말이다.
그때부터 실크로드의 기후, 문화, 역사 등을 인터넷과 서적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참고로 우리의 여행지는 아래와 같다.
인천 -> 우루무치 -> 돈황 -> 하밀 -> 선선 -> 투루판 -> 우루무치 -> 인천
실크로드란 말은 비교적 근래인 1877년 독일 학자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에 의해 처음 사용됐다고 하는데 이 용어에 의해 서구사람들에게는 실크로드 상에 있는 수많은 고대 오아시스 도시들이 도시의 실체로서 인정받기 보다는 천일야화처럼 아련한 꿈같이 신비에 쌓인 몽환적인 존재로 비쳐졌다.
따라서 후에 유물의 약탈경쟁이 벌어질 때도 탐험의 대상인 것처럼 미화하게 했다.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은 초기에는 투르크, 위그루, 한 때는 티벳 등 계속해서 바뀌지만 청나라 시대에는 중국이 지배권을 확립하고 근대의 한 때는 위구르인들이 세운 카쉬가리아 정권(1864~1877)이 중국을 자기땅에서 축출하고 지배권을 확립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위구르인들의 민족적 각성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현재도 간헐적으로 독립을 향한 저항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전세계에 소장된 중앙아시아 유물 13대 주요소장국중 하나라고 한다.
우리나라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중앙아시아 유물은 일본의 오타니 컬렉션의 일부로서 60점의 벽화를 포함 약 1,70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한병삼 전중앙박물관장이 세계 어느 박물관의 중앙아시아 유물과 비교해도 뒤질 바 없다고 자부했다고 한다.)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강대국의 자국이기주의는 강자의 논리로 진행되는 많은 것들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둘때, 과거에 이루어진 상황들을 강자의 논리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근래 중국이 주장하고 있는 중앙아시아 유물의 소유권 문제도 진정한 소유자는 위구르인이 맞는 것 아닌가 싶다.(옛날 일제 식민지 시절에 1866년 병인양요때 빼앗긴 외규장각 도서 345권을 일본이 프랑스에 돌려달라고 했다면 우리 기분이 어땧을까?)
원래 위구르인은 투르크계의 민족으로 중앙아시아는 동과 서의투르키스탄으로 나누는데 동은 중국에 병합되어 신강위구르자치구로 불리고 있고, 서는 과거 소련령으로 있다가 독립하여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이 되었다.
중국은 초기에 서구열강의 중앙아시아 고고학활동을 막지 않고 출입허가를 내주었으나 나중에는 유물의 반출을 금지했으며, 오늘날 시각은 당시 발굴 허가를 내줄 때하고는 매우 다르다.
영국의 스타인이나 프랑스의 펠리오, 독일의 르콕 등을 도적놈으로 여기고 있다.
1928년 독일의 폰 르콕이 벽화 대부분을 뜯어낸 곳을 방문한 영국인 여행가 레지널드 숌버그 대령의 말은 시각 차이는 있겠지만 그 당시의 현실을 말해준다.
"그것은 정말 신이 도우신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무슬림들이 그 뒤로 남아 있던 벽화 거의 모두를 수치심도 없이 망가뜨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 지역의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종교적인 관점에서 벽화를 훼손하고, 조각상을 파괴했으며, 때로는 홍위병에 의해서도 파괴되었다.
또 선교사 밀드레드 케이블과 프란체스카 프렌치는 그들의 공저 고비사막에서 목격한 베제클릭 근처에서 목도한 주민들의 유적 파괴행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농부들에 의한 고대 유적들이 파괴되고 있는데 유적의 오래된 흙으로 객토할 경우 밭이 비옥해 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술 더 떠 성벽 안의 땅을 갈아서 작물을 심었는데 농작물을 위한 관개수로 때문에 건조한 기후에서 보존이 가능한 점토구조물 등이 치명타를 입었다"
발굴에 직접 참여한 독일의 폰 르콕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지역 농민들이 벽화의 밝은색 안료를 특수 비료로 믿고 마구 긁어냈으며, 나무가 부족한 이 지역에서 유적의 들보들은 땔감이나 건축 자재로 각광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중국인 관리들도 유교 신봉자로서 불교를 혐오했던 까닭에 무슬림들의 그런 행동을 막지 않았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요즘에 중국이 말하는 적대감이 처음부터 계속된 것은 아니며, 또한 그대로 나둔다고 해도 제대로 보존됐을까 하는 의구심이 남는다.
실크로드의 처음 개척자는 예수가 태어나기 1세기 전 중국 한무제 시절의 장건인데 한무제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게끔 끊임없이 국경을 괴롭히는 흉노족(투르크 계통)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는데 흉노에 패배한 월지와 동맹을 맺고 흉노를 앞뒤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장건을 밀사로 파견한다.
그러나 장건은 감숙성 지역에서 흉노의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된 뒤 약 10년을 포로로 생활한 후 탈출에 성공해 월지로 가나 월지는 흉노의 공격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 갔으며 복수의 마음마저 사라져 버린것을 확인한 후 그 곳에 약 1년을 머물며 중앙아시아 여러부족과 지역의 정보를 수집한 후 돌아오다 다시 흉노에 붇잡혔으나 흉노의 내란을 틈타 한나라로 13년 만에 돌아온다.
장건이 가져온 중앙아시아의 군사, 정치, 경제, 지리 등의 정보는 한의 조정에 일대 충격을 일으킨다.
가장 중요한 정보는 페르가나에서 발견된 천마라고 보고한 새로운 종류의 군마인데 한무제는 흉노와의 기마전에서 이 말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구하기 위해 몇차례 사절단을 파견하나 실패하고 결국 대규모 원정단을 보내 소량의 군마를 받고 조건부 투항을 수용하고 귀환한다.
이후 한무제는 제국의 영토를 서쪽으로 확장시키려 여러 차례 서역 원정을 한다.
이후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중국, 돌궐족, 위구르, 티벳, 아랍 등이 계속 격돌하게 된다.
그러나 서방에서 아랍이 승리함에 따라 타클라마칸 전지역이 무슬림으로 개종한 이후
이는 무슬림들이 금기시했던 형상예술(특히 사람을 묘사한 것)의 종말을 가져온다.
15세기가 되면 이슬람은 타클라마칸 모든 지역에서 지배 종교로 자리잡고 해상교역로가 활발해 지면서
중국은 명대에 가서 실크로드가 거의 방치된 상태에서 서방과의 접촉을 끊고 고립되어 쇠퇴의 길로 들어가면서
이 지역의 오아시스들은 수세기 동안 방치되면서 영면속으로 들어간다.
당시 서구 열강은 그리스,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와 같이 거창한 발견들이 막 쏟아져 나옴에 따라 이 지역에 무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8월 8일(화) : 인천에서 우루무치로
아침 일찍 일어났다. 계속된 폭염으로 잠도 설치고 근래 몸상태도 찌푸둥하니 좋지가 않다.
게다가 어제 아침에 일어나니 피곤했던지 눈에 실핏줄이 터져 한쪽 눈이 빨갛다.
평균 1~2년에한번씩 이런다. 하필이면 여행을 앞두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오후부터 휴가를 냈기에 출근을 하니 오늘따라 바쁘다. 좀 한가하면 안과에 갔다 올려고 했는데 병원 갈 시간도 없다.
오전을 바쁘게 마무리하고 집에 오니 집사람이 가방을 싸느라고 난리다.
우선 인터넷 검색에 나온 사진을 근거로 준비했던 두꺼운 잠바류를 끄집어 내고 가방을 한 개로 줄이고 배낭을 메기로 했다.
챙기기는 했는데 무었이 빠졌는지 모르겠다. 정리를 하고 6시30분 까지 공항에 오라고 해서 4시가 조금 넘어서 집을 나섰다.
차를 장기 주차를 시키면 주차료가 하루에 8,000원이고 5일이 지나면 6,000원인가 한단다.
전에는 외부 무허가 주차업차를 시킨적이 있는데 말들이 많아서 이번에는차를 집에 놓고 버스로 가려는데(일반버스 4500원, 공항버스 8,000원) 집을 나서니 날씨가얼마나 덮던지 벌써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집사람이 택시 타고 가잔다.
날도 더운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택시를 집어타니 택시 안도 시원하고 길도 하나도 막히지 않는다.
공항에 도착하니5시밖에 않됐다.
택시비로 통행료 포함해서 50,000원을 주고(조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 들어가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다.
우선 환전을 달러와 인민폐로 바꾸고 핸드폰을 로밍서비스 받고 나도 한시간 이상이 남는다.
실실 여기 저기 구경하다가 전에 KAL 이용하고 마일리지 입력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 입력도 하고 집사람 마일리지 카드도 만들었다.
저녁 6시쯤 되니 실크로드 문화탐당을 주관하는 사랑밭팀들과 참여자 들이 속속 나타났다.
가이드인 나스관광 소속 박신희 씨가 나타나 인사를 하고 여러가지 주의사항과 출국을 위해 여권을 건넨다.
미안하지만 몸매와 같이 넉넉해 보인다. 기분이 좋다.
잠시후 보딩패스를 받고 대한항공에 가서 마일리지 입력후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최신기종인 미니캠 HD 화질용 산요 Xaxti HD-1과 소니 사이버샷 T-30이 있어서 세관에 얘기하니 웃으면서 그런 것은 신고하지 않아도 된단다.
안으로 들어가서 면세상점을 둘러보아도 마땅히 살 것이 없다.
문득 우리나라 사람들 소득 수준이나 생활이 많이 좋아 졌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초 보딩패스에 나와 있던 Gate가 갑자기 변경되었다고 한다. 속으로 이런 경우도 있구나 싶다.
비행기에 올라 잠시후 이륙을 하고 잠깐 조니 착륙한다고 방송이 나온다.
눈을 뜨니 사방이 컴컴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둡기만 하다.
현지 시각이 새벽1시,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새벽2시다.
입국신고를 하는데 공항을 새로 지었다고 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짐을 부친 것이 없어서 제일 먼저 나왔는데 새벽 1시 20분 아직도 일행들은 나오지 못하고 있다.
현지 가이드를 만나서 인사를 하고 공항밖으로 나오니 많은 택시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나한테 무어라고 하면서 중국인이냐고 묻는 것 같아서 "한궐언" 하면서 공항 밖을 둘러본다.
새벽 2시에 버스를 타고 어두운 거리를 약 30분 정도 달려 5성호텔인 은성호텔에 도착했다.
방을 배정받고 방으로 가니 시설이 무척 좋다.
외부의 거실, 주방, 화장실, 침실, 거품이 나오는 욕조, 샤워실, 내부 화장실 아마도 스위트룸인 듯하다.
시계를 보니 3시 16분 워낙 피곤해서 아무데나 옷 집어 던지고 세수만 하고 자리에 누웠다.
내일을 잔뜩 기대하면서……
8월 9일(수) : 우루무치
알람을 맞춰놓고 잠이 들었는데도 새벽에 일찍 잠이 깼다. 아마도 흥분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옆을 보니
집사람은 정신없이 잠들어 있다.
시계를 보니 6시 40분, 커튼을 여니 우루무치 시내가 새벽 여명빛을 맞아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먼저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나오니 모닝콜벨이 울린다.
집사람을 깨우고 서두른다. 기상 7시, 식사 8시, 출발이 9시란다.
8시경 호텔식당으로 가니 벌써 사람들이 많다. 부페식인데 먹을만 하다.
베이컨을 한 쪽을 가져왔는데 어떻게 딱딱한지 입이 아프다. 다른 음식들도 다소 향이 강하지만 괜찮다.
중국 신강위구르자치구의 크기는 166만km2으로 중국 전체 면적의 1/6을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는 208만명(2000 발행책자 기준) 정도이다.
우루무치는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수도로서 한국과는 약 4,500km 떨어져 있으며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서는 3,752Km 떨어져 있다.
몽고말로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우루무치는 제일 가까운 바다도 2,240Km 떨어져
지리적으로 바다에서 제일 먼 도시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194mm이고,
제일 따뜻한 7월과 8월의 평균 기온은 섭씨 25.7도이고 제일 추운 1월의 평균기온은 영하 15.2도이다.
9시를 조금 넘어 호텔을 출발해서 천산천지로 행했다.
10시 40분 쯤 천지 입구에 도착하니 차가 많이 밀려 있다. 관광객이 많은 듯 싶다.
잠시 내려서 사진을 찍고 계곡물을 구경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위로 더 이동해서 주차장에 11시쯤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천지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기위해 탑승구 쪽으로 약 10분 정도 걸어서 이동했다.
날씨가 늦봄같이 따사롭고 바람도 살살 불어서 너무 좋았다.
복장을 아침에 나오면서 어떻게 입어야 하나 고민도 하면서 긴팔로 입었는데,
긴팔이나 반팔이나 괜찮고 오히려 반팔이 더 눈에 많이 띤다.
중간에 길에서 통제요원들이 일반 차량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통제하고 있으나
공안차가 선도하는 차량들은 통과시켜 준다.
역시 어디를 가나 끗발있는 사람들은 통하나 보다.
요즘 판검사 출신이나 현직판사가 사표를 내고 구속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점진적으로 변화되고 있지 않나 싶다.
케이블카 탑승구 앞에서 예쁜 카자흐 아가씨가 웃으면서 서 있다.
역시 신강위구르 자치구가 다양한 소수민족이 어울려 사는 것 같다.
가이드 말로는 중국정부의 한족 이주정책에 따라 현재는 한족이 약62%로 제일 많으며
주요 소수민족은 위구르족, 소그드족, 카자흐족, 만주족 등이라고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약 10분 이상 올라가서 천산천지 입구에 도착하니 다시 천지구간차를 타고 천지로 이동한다고 한다.
천지구간차로 약 10분 꼬불꼬불 올라가니 넓은 광장에 관광상품가게와 공연장 비슷한 것이 나오고,
이윽고 구간차에서 내리니 광활한 천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유람선과 보트가 떠 있고 저 멀리 보고타봉인지 모르지만 산머리에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가이드 말이 천지를 구경하고 이 곳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란다.
시간이 12시 5분, 그러면 빨리 천지에서 사진을 찍어야지 하면서 집사람 손을 잡고 천지로 내려간다.
일행들도 주변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천지에 내려오니 주변의 초지와 돌출된 암석, 그리고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시원하다.
자장면 집이 없어서 그렇지 제주도 마라도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현지 아가씨들이 현지 옷을 빌려주고 있다.
집사람과 온갖 포즈를 잡아가며 사진을 몇장 찍고 올라오니 어라 한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같이 온 사람들이 안 보인다.
집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이동하지 않고 부리나케 천지로 내려오더니 그런다고 투덜댄다.
겉으로는 별 일 없는체 하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태산이다.
천지쪽을 둘러봐도 일행은 보이지 않고 기념품 가게를 가봐도 일행이 없다.
벌써 식당으로 내려갔나 하면서 같이 온 조장에게 전화를 거니 천지 선착장에서 배를 타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다.
알았다고 하고 집사람과 같이 뛰어서 배 타는 곳으로 가보니
두 군데에서 배를 타는데 우리 일행은 멀리 있는 모양이다.
숨이 턱에 까지 차면서 뛰어가니 멀리 가이드인 박신희씨와 우리팀 조장인 권기범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뛰어가면서 미안하다고 하고 이동하는 것을 몰랐다고 변명을 하면서도 민망하기 그지없다.
저 아래 선착장으로 내려가니 그 동안 기다리고 있던 배가 떤난다.
할 수 없이 다음 배를 타고 따라갔다.
이윽고 서왕모사당을 구경하고 온 일행과 우리배가 만나서 겨우 겨우 사정을 하고 우리배로 갈아탔다.
타면서 일행에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니 잘 모르는 눈치다.
천지는 둘레가 11km정도 되고 백두산 천지의 약 1/3 규모란다.
전설에 의하면 서왕모가 이 곳에서 목욕하던 곳이고 3천년 전 주나라 목왕이 서쪽 지방을 주유할 때 서왕모가 성대한 환영연회를 베푼 장소가 바로 천지라고 한다.
한 바퀴를 배로 돌아본 후에 사진을 찍도록 약간의 자유시간을 가졌다.
1시50분쯤 다시 모여서 10분쯤 걸리는 식당으로 걸어갔다.
이 곳의 식사는 현지식이었는데 회교가 대부분인 까닭에 향신료 냄새가 많이 났다.
입구에는 커다란 난이라는 빵을 굽고 있었고,
한 쪽에서는 양꼬치와 양고기 바베큐를 머리채 구워서 발라내고 있었다.
회교식으로 준비된 현지식 점심을 배불리 먹고 약 3시경 일어섰다.
버스 있는 곳까지 이동하기 위하여 운행되는 셔틀버스를 타고 내려와 우리 버스로 갈아타고
바로 신강위구르자치구박물관으로 향했다.
신강위구르자치구박물관은 내부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기 때문에 기록을 남길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박물관 내부는 신강역사문물전시실, 미이라전시실, 역사문물전시실로 나누어 있었다.
그 중에서 백미는 약 10여구의 미이라였는데 누란의 미녀와 고창왕국의 장군의 미이라 등 약 10여구의 미이라가 있었는데 체구가 건장하고 키도 180cm는 되는 듯 싶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시간이 5시 40분이었다.
저녁 6시경 버스를 타고 우루무치 시내에 있는 한국음식점으로 향했다.
오늘 밤에 우루무치역에서 돈황으로 가기 위해 유원역까지 12시간에 걸쳐 침대칸이 있는 특실열차를 이용해 이동할 예정이란다.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를 한 병 시켰는데 40위안이란다.
우리돈으로 치면 5,200원 …..음 비싸군 하면서 먹었다. 그래도 맛은 좋았다.
단지 제육볶음같은 고기가 너무 크고 질겨 반 이상을 남겼다.
부지런히 식사를 마치고 우루무치역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7시, 내부는 복잡하고 테러가능성 때문에 수화물 검색을 한다고 하면서 소지품 관리를 잘 하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공항같이 X-ray 검색대가 있고 통과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로 많이 붐볐다.
우리가 탑승할 곳은 3층이란다.
저녁7시 44분 기차는 출발했고 이 곳은 북경시간을 쓰기 때문에 많이 환하다.
실제 시간은 북경과 2시간 정도 시차가 있다고 하니 6시 전이라 할 수 있다.
차장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점점 황량해지며 사막으로 간다는 느낌이 실체로 다가온다.
어제도 잠을 설쳤으니 오늘은 일찍 자야지 하면서 자리에 눕는다.
이 칸에 같이 계신 분들도 피곤한지 일찍 침대에 든다.
한 칸에 4인석이니 양쪽으로 위 아래 침대가 있다.
누우니 기차의 잔 진동과 부드러운 소음,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잠속으로 빠져든다.
서울은 열대야라는데 하면서……
8월 10일(목) : 돈황
목이 칼칼하고 코가 감기에 걸린 것처럼 막힌 느낌에 잠을 깻다.
부드러운 진동이 밑의 침대를 통해서 온 몸에 전달돼 온다.
밖은 아직 컴컴하고 차가운 에어컨 냉기에 공기가 서늘하다.
몇시나 됬을까? 일어나 불을 켜고 싶지만 같이 자는 사람들 잠을 깨울까봐 그냥 누워서 한 잠을 더 청해본다.
한참을 누워서 있어도 잠은 더 오지 않고 오히려 목만 더 칼칼하고 코도 밍밍하니 막혀온다.
안되겠다 싶어서 창가에 있는 미등을 켜고 일어나 보니 5시30분경.
일어나 나와 화장실로 가니 사위가 다 조용하다.
창밖의 사물은 복도의 빛이 비치는 구간만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고 또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밖의 출입구 쪽에 서서 밖을 자세히 볼려고 두 손으로 얼굴 양옆을 가리고 밖을 보려고 해도 차장의 빛이 비치는 범위가 너무 짧다.
다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잠을 청해도 벌써 저만치 도망간지 오래다.
한참을 뒤채며 누워있다가 다시 코가 맹해진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복도를 서성이다 비누를 챙겨 세면장으로 간다.
이 닦고 세수하고 나오니 입구칸의 현지인 한명이 녹차컵인 것 같은 것을 가지고 나온다.
아마도 뜨거운 물 받으러 가느가 보다.
창 밖으로 희미하게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아침 6시 30분이 지나자 점점 많은 분들이 일어나고 분위기도 어수선해 진다.
기차이동을 할때 먹는 라면이 끝내준다고 해서 가져온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라면맛이 정말 죽여준다.
아침 8시 30분이 조금 안돼서 목적지인 유원역에 도착했다.
유원역에서는 버스로 약 2시간을 이동해 우리의 최종목적지인 돈황으로 이동할 계획이란다.
내리자 마자 부슬비 같은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가이드 말로는 1년에 1~2차례 비가 오는데 비오는 날은 복 받은 날이란다.
우리야 조금 불편하지만 조금 많이 내려 많은 사람이 행복해 했으면 한다.
내려서 버스를 타고 조금 이동해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도착시간 8시 50분 현지식 식당이었는데 그런대로 깨끗하고 사람도 제법 많아 보였다.
식사는 그런대로 맛있고 먹을만 하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그새 내리던 비가 입맛만 다시고 그쳤나 보다.
바닥에 흔적만 남아 있다. 시가지를 둘러보니 우리나라 70년대쯤 연상케 한다.
그런데 무심코 지나가는 차를 보니 아니 웬 삼륜차가 아닌가?
돌아보니 여러대가 동시에 지나간다. 아마도 영업용 차량이 아닌가 싶다.
식사를 마치고 9시 30분쯤 다시 버스에 올라 돈황으로 향했다.
돈황으로 가는 내내 황량한 사막만 보인다.
이 곳이 고비사막이니 옛날 7세기 당나라 시절 인도로 불경을 가지러 가던 현장법사가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일컬어 "바람이 불면 사람이고 짐승이고 모두 제정신을 잃고 망연자실해져서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다. 이렇게 해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여행 도중 죽음을 당했다. 이것은 모두 악마와 요괴들의 짓이다" 라고 기술했다고 한다.
또한 초기에 이 사막을 건넌 몇 안 되는 유럽인 중의 한 사람인 스벤 헤딘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최악의 사막"이라 하였고, 중국에서 치를 떠는 17호 석굴 장경동의 주인공인 오렐 스타인은 "아라비아 사막은 타글라마칸에 비하면 길들여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록 삭막하지만 버스로 가는 길은 그런대로 볼 만 하다.
약 2시간만에 돈황 외곽에 들어서니 벌써 주변의 푸른 빛이 사람사는 곳에 다 왔노라고 미리 말해준다.
농작물은 가운데 부분에는 목화를 심고 주변의 울타리는 옥수수를 세운 것이 인상적이다.
고대 중국의 영토의 수도인 서안을 떠나서 황하의 서쪽인 하서주랑을 따라서 오면 이 곳 돈황까지 오게되는데
이 곳에서 북서와 남서쪽에 있는 옥문관과 양관을 지나면 서역36국으로 들어가므로
이 곳이 중국의 마지막 도시였던 셈이다.
오전 11시 15분경 돈황박물관에 도착해서 실크로드의 유래와 그 곳에서 출토된 여러가지를 보고 난 후
식당으로 가는 도중에 기념품가게를 잠깐 들렀다.
그 곳은 주로 옥종류의 물건과 직물들 그리고 카펫종류를 진열해 놓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곳이 제일 비싼 것 같았다.
그 곳에서 도자기류와 직물류를 2점을 사고 나와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은 중국식 음식점이었는데 시설도 깨끗하고 음식도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그 옆의 돈황국제호텔로 이동했다.
호텔의 등급은 별이 4개였는데 우루무치의 5개보다는 많이 열악했다.
그래도 돈황의 호텔비가 우루무치보다 더 비싸단다.
오후 5시 30분에 만나서 명사산과 월아천을 보러 간다고 하기에 호텔로 들어가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5시쯤 나와서 돈황시내를 둘러보았는데
관광지로서 현재까지의 시설은 별로지만 모든 보도 및 차도를 새로이 포장하고 있었다.
아마도 몇 년만 지나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길에서 포도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옆에 딸인지 며느리인지 젊은 여자가 애기를 업고 있었다.
포도를 사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저울로 2.5를 가르키는데 아마도 Kg당 2.5위안이라는 것 같다.
포도를 서너송이 사고 10위안을 주니 5위안을 거슬러 준다.
애기한테 과자를 줄려고 가방을 뒤적거려도 가지고 나온 것이 없다.
들어와서 나가기 전에 몇개 먹어보니 아주 맞있다.
잠시 쉬고 난 후 5시 30분경 다시 버스를 타고 명사산과 월아천 지역으로 이동했다.
날씨도 적당하고 저녁무렵이라서 덮지도 않고 딱 좋다.
출발할때 가이드가 신발이나 옷에 모래가 많이 들어가 망치기 쉬우므로 옷은 가볍고 싼 것,
신발은 샌들종류가 좋다고 해서 반팔티에 반바지 차림과 신발은 샌들을 신었다.
명사산은 돈황 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5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고운 모래산이 약 40Km 정도 이어져 있다.
우측의 월아천은 1000년 동안 한 번도 마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요즘은 수맥이 끊어져서 옆의 저수지에서 물을 공급한다고 한다.
명사산에 도착해서 모래를 밟아보니 밀가루 같은 것이 너무 곱다.
신발사이로 들어와서 발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다. 아하 이래서 운동화 종류보다 샌들이 좋다고 했구나 하고 부러 발을 모래 사이로 밀어넣어 들어올려 모래를 신발사이로 흘려본다.
코스는 낙타를 1시간 타는 것과 경비행기를 타는 것이 있는데 대부분이 낙타를 탄다고 한다.
저녁 7시 30분경 낙타를 타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쌍봉낙타를 타고 일어설때는 두려움에 두 손을 안장의 손잡이에 꼭 잡고 있지만
한 5분 쯤 지나면 처음의 두려움은 다 날라가고 신이 나기 시작한다.
이윽고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카메라를 한 손으로 잡고 사진을 찍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두 손으로 찍고 돌아보기까지 한다.
낙타를 타고 약 30분 쯤 올라가면 반환점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내리고 모래언덕을 올라가 온갖 포즈를 잡으면서 사진도 찍고 좀 놀다가 약 20~30분 후에 다시 이 곳에 와서 내려가는 낙타를 타게 된다.
꼭 주의해야 할 것은 올라갈 때 낙타번호를 기억했다가 내려올 때 그 낙타를 타야 한다는 것이며,
종점에 와서는 표를 반납해야 한다고 한다.
낙타를 타고 월아천 있는 곳으로 왔는데 너무 늦어 벌써 8시 40분을 가르키고 있다.
월아천은 모래언덕 위에 올라가서 봐야 한다고 해 올라가는데 2팀이 서로 나누어 시합을 하자고 한다.
처음에 출발할때는 중간에 약간 돌출부분이 있어 한 50m 쯤 되는 줄 알고 시작했는데 올라가보니 그게 아니고 100m도 넘는 것 같다.
가파른 모래언덕을 모래속에 파 묻힌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상상해보라.
숨이 턱에 까지 차서 가뿐 숨이 헉헉 막힌다.
올라오니 9시 저 멀리 월아천이 벌써 등불을 켜고 있다. 다들 표정들을 보니 가관이다.
이 곳에서 다시 중간쯤 내려가 그 곳에서 나무 썰매를 타고 올라온 언덕을 타고 간단다.
썰매를 타고 내려가서 월아천까지 갔지만 너무 어두워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나올때 다시 낙타를 타고 나오는데 앞의 김은영씨가 타던 낙타가 일어서다가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바람에 소지품을 찾느라 낙타를 미리 보내고 한참을 찾다가 늦게 나왔다.
저녁 늦게 돈황야시장에 택시를 타고 갔는데 시원한 음료수와 맥주, 그리고 특산품 등을 팔고 있었다.
약 30분 정도 둘러보다가 돌에 그린 기념품을 하나 사고 쉴려고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또 내일을 위해서 자는게 남는거야 하면서......
8월 11일(금) : 돈황 -> 하밀
어제 모래산을 오르내려서 그런지 몸이 무겁다.
특히 오늘은 조금 일찍 서둘러서 막고굴을 보고 약 6시간에 걸쳐 하밀로 이동할 예정이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막고굴은 1987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전체 1000개 이상의 굴이 있었다고 추정되는데, 현재는 492개의 동굴이 보존되고 있고
그 중 232개가 당나라 때 만들어 졌다고 한다.
막고굴은 장경동으로 유명한데 1900년 왕원록이라는 도사가 16호 동굴을 치우다가 발견했는데
그 안에서 세계적으로 가치가 높은 그림과 각종 서체들이 발견되어 세계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다.
수 세기 동안 모래 속에 묻혀 있던 중앙아시아 유물들은
1800년대 후반 들어 부장품과 유물을 노린 도굴꾼들과 유물을 해외로 팔아 넘기려는 유물사냥꾼 들에 의해
서구에 알려지게 된다.
그 전까지는 중앙아시아 사막지대에 찬란한 불교유물 및 오아시스 문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제일 먼저 불을 당긴 사람은 인도 캘커타에서 유물사냥꾼을 통해 유물을 수집했던 영국의 훼른네이며
훼른네보고서에 의해 중앙아시아 유물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서구열강들이 중앙아시아 유물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이후 스웨덴의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이던 스벤헤딘이 타클라마칸을 측량하면서 유적 탐험을 시작했으며,
그가 작성한 지도를 바탕으로 이후 많은 고고학자들이 중앙아시아로 몰려온다.
1900년 발견된 막고굴의 장경동은 현지 태수를 통해서 북경에 보고되지만
중국 당국의 비용문제 등으로 중요성이 간과된 채 현지 보관하는 선에서 방치된다.
1907년 2차 중앙아시아 탐험에 나선 오렐스타인은 돈황지역의 만리장성을 발굴하다
돈황에서 식품과 물을 보충하러 갔다가 왕도사가 몇년전에 장경동을 발견했다는 말을 듣고
왕도사를 만나 몇개월의 설득끝에 약 4만점의 유물중 중요하다고 판단된 수백점을
단돈 130파운드를 들여 영국으로 빼 간다.
장경동의 발견을 바빌로니아 우르 유적의 발견자 레오나드 월리 경은 "미증유의 고고학적 특종"이라고 했고,
타임지는 "어떤 고고학자도 이보다 더 놀라운 발견을 한 예는 없었다"고 단언할 만큼 중요했다.
이어 뒤늦게 중앙아시아 유물경쟁에 뛰어든 프랑스는 13개 국어에 능통한 중국인 학자 펠리오를 파견한다.
공교롭게 스타인이 떠난지 3일후에 도착한 서지학자였던 펠리오는 유창한 중국어 실력으로
왕도사를 회유하여 중요한 고사본들을 약 90파운드에 입수하게 되는데,
특히 펠리오의 지시에 의해 촬영된 돈황벽화사진집 6권은
후에 백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훼손된 벽화로 인해 조상의 원전으로 남게 됐다.
또한 1912년초 일본의 오타니 백작이 보낸 탐험대는 돈황에 8주동안 머물면서
왕도사로부터 숨겨논 약 600점의 문헌들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923년 뒤늦게 미국은 하버드대학교 포그미술관의 랭던워너 교수를 파견하는데
이들은 과거 6개국이 유물을 반출한 이후 남은 유물의 상태를 살펴보려는 일종의 정찰여행이었던 셈이었다.
랭던워너 교수는 펠리오와 같은 신출내기 학자가 아니라
이미 학계에서 일급의 평가를 받는 미술사학자이자 고고학자였다.
1923가을 카라호토를 거쳐 돈황으로 온 랭던워너는
2년전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도망쳐 온 백러시아 군인 4백명이
중국 관헌에게 6개월 동안 돈황에 강제 수용된 후 저지른 벽화의 훼손행위에
분노를 나타내며 왕도사와 협상을 거쳐 소조1점과 벽화 12점을 떼어내 미국으로 반출한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1920년대 후반 중국의 유물에 관한 빗장이 걸리면서 유물쟁탈전은 막을 내린다.
막고굴 외부에서는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있지만 통제하는 출입문을 통과해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
따라서 작은 카메라는 들고 들어가지만 큰 카메라는 맡겨야 한다.
당초에 나무로 만든 난간과 통로가 있었지만, 현재는 구조물로 하부를 보강하면서 통로를 만들어 놨다.
윗 부분의 검은 부분이 녹지고 녹지 뒤가 막고굴이다.
가운데 밝은 부분이 주차장이며 아래 부분은 관리지원시설인 것으로 보인다.
아침 9시 20분경 안으로 들어갔다. 현지 돈황연구소측에서 나온 중국인 가이드가 안내를 하겠단다.
나이가 23살이고 총각인데 한국어를 배운지 얼마 안됐는데 말을 참 잘한다. 발음이 조금 어색하지만..
약 1시간 반에 걸쳐서 96호, 130호, 148호, 237호, 259호, 328호, 16호, 17호 총 8개의 석굴과 전시장을 관람하고 나와서 10시 55분경 기념품점으로 갔다.
물건은 대체로 비슷하다. 나와서 권팀장이 사다준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나무 밑에 앉아서 먹는 맛이 일품이다.
11시 반 다시 버스에 올라 돈황 시내의 현지 음식점으로 갔다.
점심을 먹은 후 고비사막을 지나 하밀로 이동할 예정이다.
어차피 약 6시간 가까이 버스로 이동할 예정이니 점심때 소주와 고량주를 몇잔씩 돌렸다.
적당히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다.
돈황시가지를 벗어나 고비사막으로 들어가니 다시 황량한 사막이 나오는데
도로 포장이 보통하는 아스콘 포장이 아닌것 같고 아마도 골재를 깔고 아스팔트 유제를 뿌리는
DBST 포장이 아닌가 싶다.
차 뒷부분에 앉다보니 꼭 말 탄것 같다.
소화가 참 잘 된다.
저 멀리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뒷쪽으로 호수 같은 것이 보인다.
가이드가 신기루란다.(정말 신기하네)
약 2시간을 달려오니 우리가 내렸던 유원역 앞의 4거리가 나온다.
그 곳에서 좌회전을 해서 북서쪽으로 4시간 정도를 달려가야 하밀이 나온다.
오후 4시쯤 주유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북서로 달려간다.
중간에 다시 한번 쉬면서 고속도로 변에서 깍아 먹는 하미과가 일품이다.
사막의 더운 열기가 바람에 실려 불어오지만 과일은 그런대로 시원하고 달다.
저녁 8시가 넘어서 하미에 도착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8시경에 호텔 뒷부분에 있는 회교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방으로 일찍 올라오니 저녁 9시경이다.
내일은 하밀 근처의 빠리군초원과 회왕릉을 방문할 예정이란다.
오늘도 일찍 쉬려고 잠자리에 든다.(여행 다니면서 이렇게 착실하게 잠 많이 자 보기도 흔치 않다.)
8월 12일(토) : 하밀
오늘 일정은 빠리군초원과 하밀의 회왕릉을 방문하고
오후에는 하밀시내에서 자유시간을 예정이라고 한다.
일정이 여유가 있어 늦게 일어나 식당에 가니
현지인들이 식사를 하고 난 후라서 먹을게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래도 먹을만한 것을 챙겨서 식사를 하고 나오니
아마도 호텔의 직원인 듯한 젊은 남여 20여명이 한데 모여 아침체조를 하고있는 것이 보인다.
10시반경 빠리군초원을 향해 출발했다.
하밀시에서 도시외곽으로 가는 길 옆의 가로수가 여러 줄로 도로를 따라 심어져 있는데
키는 약2~3m 쯤 되고 가로수 간격은 약 3m 간격으로 쭉 심어져 있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다.
버스로 한참을 갔는데도 똑 같다.
족히 한 10Km 이상은 되는 것 같은데 가느다란 검은색 고무호스를 여러줄로 깔아놓고
호스옆에 구멍을 뚫어 나무에 물을 주는 것이 보인다.
전에 어디선가 읽은 글에서 중국이 타클라마칸 사막공로를 개통하면서
모래바람에 도로가 덮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 5Km 간격으로 우물을 파고 여러 줄의 호스를 통해서 나무에 물을 주는데
사람이 24시간 상주하면서 관리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역시 중국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사막지대를 벗어나자 이윽고 산악지대가 시작되는데 계곡을 따라 길이 나 있었다.
주변에 물 웅덩이 하나 보이지 않더니 여기 계곡에는 시원스런 물이 흐른다.
가이드 말이 이 계곡이 중국에서도 유명한 계곡이라고 한다.
깍아지른 벼랑사이로 난 길로 버스가 달려가는데
커브구간에서는 전방시야도 확인하지 않고 속도를 내어 돌아가는데 "운전 참 겁나게 하네"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정도 계곡을 빠져나오자 울창한 침엽수림이 나타나는데
군데군데 원형탈모증처럼 풀밭에 진한 녹색의 관목숲이 점점이 박혀있다.
오전 11시쯤 빠리군초원에 도착했는데 광활한 초원이 쭉 펼쳐져 있고
뒷편으로는 산악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것이 장관이다.
차에서 내리니 아차차 오늘 옷을 잘못 입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따라 반바지 차림으로 나왔는데 서늘한 바람이 허벅지를 감싸고 돈다.
꼭 우리나라 봄날씨 같다. 이런 곳은 가이드가 미리 얘길해줘야 긴 바지에 겉옷을 입을게 아닌가!
싸오기 까지 했는데...(이런 걸 가이드해야 하잖아)
몽고족이 운영한다고 하는 이 초원을 현지인이 살고 있는 나무 담장을 따라 걸어가는데
조그마한 여자애가 하얀색 양을 한 마리 끌고 나온다.
너무 이뻐 보여 그 애하고 사진을 찍는데 여자애가 깜직하게 손으로 V 자를 그리며 포즈를 잡아준다.
모이는 시간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2호차가 떠나고 약 30분 이상 기다렸다.
나중에 듣자니 우리팀에 미인들이 많아서 보통 30분 타는 승마를
남자들은 30분도 안태워주고 팁 달라고 실강이를 하는데
여자분들은 1시간 이상 태워 주고도 팁 달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역시 이뻐야 해 ㅋㅋㅋ
우리 권팀장이 화가 좀 난 듯하다.
버스는 늦게 출발해서 오는 중에 위 사진의 계곡에서 잠시 휴식을 갖고 하밀 시내로 돌아왔다.
3시쯤 늦은 점심을 중국식으로 해결하고 잠시 숙소에서 쉬다가
이번에는 하밀 시내 외곽에 있는 회왕릉으로 갔다.
회왕릉은 청나라 시절 이 곳을 약 200년간 통치했던 회왕의 가족묘인데
1840년에 조성됐다고 하는데 높이 25m의 돔구조물이 인상적이다.
그 옆의 회교사원은 목조 구조물로 만들었는데 가운데에 나무기둥이 7줄로 쭉 서 있고
옆에는 양쪽으로 측랑처럼 여러개의 방들이 조성되어 있었다.
뒤 쪽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관리하는 여자분이 사직찍지 못하게 한다.
그래도 눈을 피해 후레쉬없이 사진을 찍는다.
천정에는 채광구가 여러개 조성되어 있었는데
약 4m * 4m 정도 되는 정사각형 천정을 들어올려 사방으로 창문을 내어 채광을 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현지인으로 보이는 분이 흥이 나서 춤을 추고 있길래
촬영을 하려고 카메라를 가르키며 동의를 얻은 후 춤을 요청했는데
쑥쓰러운지 자꾸 빼다 결국은 한 춤 보여주신다.
5시쯤 회왕릉을 나와 하밀시내 쇼핑몰이 몰려 있는 거리로 이동했다.
저녁 6시 반까지 자유시간을 얻어 쇼핑을 하는데 달러는 통용이 안되고 인민폐만 가능하단다.
집사람과 몇 군데 들렀는데 영 마땅치가 않다.
결국 세일한다는 표시가 붙은 조그마한 신발가게로 들어갔는데 신발의 모양이 독특하다.
집사람이 본인 것하고 딸래미 것하고 2개를 사겠단다.
분홍색과 연두색 가죽신 2켤레를 540위안을 줬는데 깍을려고 하니 여기는 정찰제라 안 된단다.
결국 한 푼도 깍지 못하고 다 주고 나왔다.
모이는 시간이 저녁6시반, 날은 뜨겁고 아직도 40분 가까이 남았다.
근처의 공원앞에 가니 조그마한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판다.
물어보니 1위안이란다. 2개를 사니 인상좋은 아주머니가 의자도 챙겨주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가게 옆으로 구두 닦는 여자분들이
구두약 칠하는 것은 안 보이고 물 뭍힌 솔질후 천으로 닦는 것만 보인다.
숙소로 돌아와 역시 중식으로 식사를 마친후 저녁에는 세미나 룸에서 레크레이션을 즐긴후 방으로 올라간다.
내일은 선선을 거쳐 투루판까지 이동한다는데 중간에 쿠무타크라는 모래사막을 간다는데 기대가 된다.
점점 더운 곳으로 들어가는데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나 걱정이다(뒤집어 써야 하나 벗어야 하나?)
8월 13일(일) : 하밀 -> 선선 -> 투루판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났다.
오늘은 하밀을 출발해서 선선에서 점심을 먹은 후 인근에 있는 쿠무타크 사막을 보고
다시 투루판으로 이동할 예정이란다.
호텔 뒷편에 있는 회교식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10시경 버스에 올라 하밀을 출발했다.
도중에 물과 개인용품을 사기 위해 인근슈퍼에 들렀는데
길가에서 장기두는 사람, 악기 연주하는 사람 등 아침거리가 여유롭다.
하밀에서 물과 몇가지 필요한 것들을 사서 1시간 반을 달려 사막공도의 톨게이트를 지나 잠시 쉬었는데
이런 곳에서 생리작용을 해결하기가 쉽지가 않다.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바닥이 지저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앞에도 문이 없고 전면도 바닥 아래로는 없어서
바깥에서 부는 바람이 아래를 통해 위로 솟구쳐 오른다. (오줌발도 날리고 ㅋㅋㅋㅋ)
조금만 신경쓰면 고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 돈황에서는 식당 여자화장실이 앞에는 거울이 있고 뒤에는 일 보는 데가 있는데
문이 없어서 거울을 통해서 다 보인다고 하니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다시 길을 떠나 12시반경 고속도로변 노견에 차를 세울 수 있는 공터에 잠시 차를 차웠다.
아까 톨게이트에서 일을 보지 못한 분들이 이제는 스스럼 없이 버스 좌측은 남자, 버스 우측은 여자
이렇게 나눠서 사막의 모래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음 역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나 적응해 살아 가나보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후끈 열기에 달궈 있는 것으로 보아 뜨거운 곳으로 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후 3시가 다되서 선선시내로 들어섰다.
역시 거의 같은 중국식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쿠무타크 사막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입구로 쭉 걸어가는데 양쪽의 포도가 잘 익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탐스럽다.
하지만 이런 뙤약볕에서는 돈을 주고 포도를 따 먹으라고 해도 못할 것 같다.
조금 더 들어가니 커다란 나무 그늘 사이로 음료수 등을 파는 가게가 있고 주변에서 쉬는 사람들이 보인다.
쿠무타크 사막안으로 들어서자 밀가루 같은 고운 모래가 발에 밟히는데
돈황 명사산의 모래보다는 색깔이 더 노랗다.
순간적으로 샌들 사이로 닿는 모래가 발을 댈 수 없을 만큼 뜨겁다.
대기온도는 약 40도 정도 되는 것 같고 지표면의 온도는 70도가 넘을 거라고 한다.
가이드 설명이 이 곳의 모래는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사막에서 날리던 모래가
이 곳에서 부딪혀 떨어져 쌓인 것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 타는 사막차는 몸이 불편한 일부 일행들은 타지 않았는데,
막상 타보니 사막의 모래로 달려나가는 차량의 속도가 50km 이상으로 느껴지는데
날리는 모래가 얼굴로 막 달려든다.
눈 앞의 모래언덕을 넘어가자 차량이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윽고 높은 모래언덕 옆을 달리는데 차가 꼭 뒤집어 질 것만 같다.
자연히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앞의 쇠파이프를 두손으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앞만 바라본다.
힘은 들지만 정말로 스릴 만점이다.(이 곳을 방문한다면 사막차와 낙타를 꼭 권하고 싶다)
모래산 위로 올라가 차에서 내렸는데 차는 다른 사람들을 태우러 가고
위에서 바라보는 모래언덕이 정말 환상적이다.
바로 5m 아래 조그마한 모래 언덕에서 밀가루처럼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에는 선선시가지가 눈에 들어오는데 정말 희한하다.
어떻게 시가지 주변에 이런 모래산이 형성될 수 있을까?
한참을 구경하다 다시 사막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올라올때처럼 두려움 같은 것은 없고 신나기만 하다.
옆에 앉은 집사람도 재미있는 모양이다.
잠시후 입구에 도착했는데 오히려 시간이 아쉽다.
그 옆에 사막의 모래조형물을 만들어 놓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모래로만 만들어 놓은 구조물들이 건조한 기후에 뭉그러지지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신기하다.
아마도 물을 뿌리며 조성한 뒤에 표면에는 어떤 피막제를 뿌리지 않았나 싶다.
내려오다 보니 군데군데 부서져 훼손된 곳이 보인다.
구경하고 내려와서 가게 앞에 가서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데
시내에서 1위안 하던 것이 여기서는 3위안이란다.
관광지의 바가지는 어디가나 똑 같은가 보다.
내려와 아이스크림 한조각을 먹고 잠시 더위를 식히면서 나무 그늘에서 한 포즈 잡았다.
나중에 이 곳에 오신 분들에게는 꼭 얼굴 마스크와 긴팔을 입으라고 권하고 싶다.
순식간에 얼굴과 팔이 벌겋게 달아 오른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분들이 기타와 비슷한 악기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테이블에는 음료수인지 술종류인지가 보이고 과일을 앞에 놓고 노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삼겹살에 소주가 보이고 담요자락에 동양화가 보일텐데 노는 모습이 천진스럽다.
오후 6시쯤 버스에 올라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투루판을 향해 출발했다.
약 1시간쯤 투루판으로 이동하자 투루판 외곽에 포도 말리는 건물들이 보이는데
계속해서 건물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다.
건물의 모양이 폭은 약 4m 길이는 약 20m 정도로 보이는데
벽돌을 꼭 붙여서 쌓은 것이 아니고 한 칸씩 띄워서 쌓아서 그 구멍으로 바람이 통하게 만들었다.
잠시 더 가자 내일 방문할 예정인 화염산이 보인다.
투루판 금신호텔에는 8시경 도착했다.
숙소에 올라 짐을 풀고 오늘은 현지의 대형식당에서 식사와 함께 쇼를 볼 예정이다.
저녁9시경 식당에 도착해서 식사를 하고 잠시 후 9시 20분부터 쇼를 시작했다.
위구르 여인들의 춤으로 시작해서 경매에 나섰던 아가씨의 노래까지
그리고 사회를 보던 남자의 춤과 입에서 불을 뿜는 묘기까지 흥미진진하다.
사회보는 남자가 대단하다. 대중의 분위기를 장악하고 흥을 돋우고
어차피 프로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영상이 여러개인데 하나만 다 못올리는 것이 아쉽다.
얼핏 시계를 보니 10시 40분 많이 늦은 시각이다. 또 내일을 위해 자러 가야한다.
내일은 투루판 일대를 본다고 하는데 보는 곳도 많고 더운 지역이라 고생이 예상된다.
그러니 일찍 자야지...
끝에는 항상 잠자는 얘기로 끝난다. 잠 못자 죽은 귀신이 있는지......
8월 14일(월) : 투루판(고창고성, 아스타나 고분군, 베제그릭 천불동)
오늘은 지금까지의 일정중에서 제일 바쁜 하루가 될 것 같다.
오늘 일정은 아침에 고창고성을 보고
아스타나 고분군 이어서 화염산으로 가서 베제크릭천불동을 보고 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교하고성, 카레즈박물관, 소공탑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도농장까지 볼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차에서 걷은 돈으로 준비한 양고기 바베큐 파티가 있다.
투루판은 지구상에서 제일 더운 도시중의 하나로 우루무치에서 남동쪽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로
시내중심지가 해수면보다 약 60m 가량 더 낮으며
분지의 가운데 부분인 달빛호수라는 뜻의 아이딩호는 수면이 해수면보다도 154m 가량 더 낮다고 한다.
이는 세계에서 제일 깊은 호수인 사해의 -392m에 이어 두번째로 깊은 곳이다.
따라서 한여름의 온도도 평균50도로 제일 더울 때는 83도 까지 올라간 적이 있단다.
일년 강수량은 16mm로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까?
인근의 오아시스 도시처럼 천산의 만년설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도시일 것이다.
아침 7시에 일어나 8시쯤 호텔 지하1층 식당으로 가니 지금까지 간 호텔중 식단이 제일 부실한 것 같다.
그래도 밥과 토마토와 계란 등 챙겨먹고 9시10분쯤 고창고성을 향해 출발했다.
아침부터 바람도 불지 않고 따가운것을 보니 상당히 더울 모양이다.
고창고성앞에 도착하니 무슨 버스터미널처럼 입구를 조성했는데
양쪽에 물건을 파는 가게가 쭉 늘어서 있다.
혹시라도 나중에 이 곳을 방문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여기에서 물건을 사는 것을 권하고 싶다.
종류도 다양하고 우루무치, 돈황, 투루판을 비교할 때 이 곳이 제일 싼 것 같다.
우리는 들어갔다 나올 때 물건을 샀는데 시간이 없어서 충분히 쇼핑을 하지 못했다.
고창고성은 옛날 고창국의 수도였는데
가이드 말이 진나라때 한혈마를 구하러 왔던 이광리가 건립을 시작했다고 한다.
442년부터 640년까지 왕국을 이루어 번창했으나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고 한다.
고창고성은 규모가 대단한데 외성의 길이가 5Km 내성이 3Km란다.
장안에서 인도로 불경을 가지러 가던 현장법사가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
국왕 국문태에게 구함을 받았다고 하며,
그로 인해 약 2개월간 이 곳에서 머물면서 설법을 했다고 하는데
국문태가 현장의 설법이 워낙 도가 높아 보내주지 않아서 나중에 투옥까지 당했지만
결국은 고창왕국을 벗어나 인도로 불경을 가지러 가는데
현장법사의 여행기에는 여행도중의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고창국의 기록은 없다고 가이드는 알려준다.
640년 당나라에 의하여 멸망된 고창고성은 이후 북쪽에서 내려온 위구르 족의 지배하에 있다가
나중에 13세기 징기스칸의 원나라에 복속된후 나중에 청나라에 속하게 된다.
고창국의 멸망후 이 지역주민들이 풀이 섞여있는 벽돌 등을 가져다 농사용으로 쓰고
목재는 건축재로 때로는 성안에서 농사를 짓느라고 관개수로를 끌여들이는라 많이 파손되었다고 한다.
이 일대의 주민들은 90%가 위구르족이고 나머지가 소그드족, 몽고족, 한족이었으나
근래에는 위구르족이 약70%이고 한족이 20%로 늘었다고 한다.
투루판은 실크로드상에 자리한 오아시스 도시로서 근대에서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는 중국에서 석유, 가스 등이 가장 많이 묻혀있는 자원의 보고이자
이 지역 남쪽의 고비사막지대는 핵실험을 시행하는 누란기지 등이 있는 까닭으로
사막이 전략적 요충지로 떠오르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자 당나귀가 끄는 20여대의 마차가 있는데 한 마차당 10명씩만 타란다.
처음에 가이드 포함해서 11명이 탔는데, 11명이라고 출발을 안하고 내리라고 한다.
할 수 없이 한 명이 내리고 출발했다.
아저씨가 어제 마나님한테 혼이 났나 보다. 지들이 우리하고 별 다를 수 있나?
암, 남자야 집에서 혼나면 짜증내는 것은 어쩔 수 없지,ㅋㅋㅋ
우리나라는 당나귀나 노새를 거의 볼 수 없는데 중앙아시아에 오면 많이 볼 수 있다.
순진하고 힘이 좋고 또 당나귀는 몇 Km 떨어진 곳에서도 짐을 가득 싣고서 집에 찾아올 만큼 영리하기까지 하다.
노새는 숫당나귀와 암말의 잡종인데 힘이 좋아서 주로 히말라야 같은 산악지대에서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탄 마차는 당나귀가 끌고 있는데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님 귀보다는 조금 짧은 것 같다.
마차를 끄는 마부가 어찌나 채찍으로 당나귀 엉덩이를 갈기는지 같이 탄 여자분들이 그만 때리라고 성화다.
우마차가 하도 다녀서 먼지가 자욱한 길을 마차를 타고 가려니 길에서 올라온 먼지가 뽀얗게 전신을 감싼다.
이런데서는 날씨가 더워도 건조하기 때문에 긴팔이 최고다.
나 역시 긴 팔에 얼굴까지 덮는 마스크에 완전무장을 하고 나섰다.
더워서 땀이 나지만 증발때문에 오히려 시원하고 안타고 먼지를 차단까지 하니 1석3조다.
약 10분을 마차를 타고 와서 그 옛날 현장법사가 설법을 했다는 사원으로 갔다.
주변이 여기저기 보수공사를 하느라고 작업대를 세워놓았고 일부는 못 들어가게 한다.
나와서 사진 찍으면서 보니 여기 저기 몇명씩 모여서 차를 끓여먹는데
사진을 찍기 위해서 조금만 흙무더기 같은 곳에 올라가면 바로 와서 못 올라가게 한다.(그래 관리해야지)
들어갈 때 탓던 마차를 다시 타고 나오는데 역시 10명만 타라고 하는데,
보니 앞의 마차는 현지인들이 탓는데 세어보니 15명이다.
이 친구 심통이 나긴 났나보다 하면서 한편 가만 생각하니 또 당나귀를 생각하면 이 것이 옳은 것같기도 하다.
주변의 다른 마차는 먼지를 풍기면서 우리 마차를 다 추월해 가는데
이 마차는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앞의 현지 관광객이 탄 마차의 꽁무니만 따라 간다.
그 먼지는 다 어디로 가겠는가?
나오니 일행의 대부분은 벌써 버스에 탔고, 좋은 물건을 싸게 샀다고들 하길래 잠깐 내려서 쇼핑을 하는데
우리 팀장님 버스 출발한다고 빨리 타란다.(옛 써 ㅋㅋㅋ)
오다가 현지인 생활하는 모습을 보려고 현지 주택에 잠시 들렀는데
이런 곳에서도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 10분을 더 이동해서 옛날 고창국의 관리들과 주민들의 공동묘지였다는 아스타나 고분군으로 갔다.
1915년 이 곳을 발굴한 영국의 스타인은 대부분의 묘지가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되어 있는 환경에서도
시신을 싸고 있는 천이나 입관자의 이름이나 이력을 기록한 명전을 발견함으로써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날린다.
이 발굴이 중국이 유물의 반출을 금지함에 따라 그의 마지막 발굴이 된다.
이곳에서 나와서 약 20분 정도를 버스를 타고 화염산 자락을 돌아가는데 좌우측의 산비탈의 모양이 장관이다.
가이드 말로는 산비탈을 올라가서 위에서 썰매를 타기도 한다는데 정말 스릴이 있을 것 같다.
이윽고 화염산과 천불동입구가 나온다.
버스에서 내려 화염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현지인이 와서 뭐라고 하는데 낙타를 타라고 권하는 것 같다.
손짓으로 거절을 하고 집사람이 낙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아까 낙타를 타라고 권한 현지인이 와서 뭐라고 하면서 돈을 달라고 한다.
가이드를 불러 통역을 해보니 자기 허락없이 낙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으니 돈을 달라고 한다.
가까이 간 것도 아니고 무서워서 한 7~8m 앞에서 찍었는데 어이가 없다.
싸울수도 없고 해서 5위안 달라는 것을 잔돈이 4위안 밖에 없어서 4위안을 주고 나오는 찝찝하다.
할 수 없지 않는가, 말이 안 통하는 내 잘못이지....
화염산을 끼고 바로 아래 골짜기 쪽으로 돌아가니 그 유명한 베제크릭 천불동이다.
이 곳은 중앙아시아 유물쟁탈전에서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10세기 이후 이 지역이 이슬람화 하면서 형상문화를 거부하는 이슬람 광신교도들에 의해
많은 불교 유적들이 눈알을 파내지고 긁히고 파괴됐으며,
그후에 1898년 러시아의 학자 클레멘츠에 의해 투루판 석굴이 발견된 이래
독일의 고고학자인 폰 르콕과 그뤼베델 등에 의해 많은 훼손을 당했다.
1905년 르콕교수는 이 곳의 벽화를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랭던워너 교수가 돈황에서 벽화를 떼간 것처럼
첨단 기법을 동원해 표면만 걷어간 것이 아니고 양 옆과 위를 판 후에 톱을 넣어서 썰어감에 따라
남아 있는 유물을 거의 파손하다시피 하여 나중에 지탄을 받게 된다.
르콕 교수가 빼돌린 천불동의 벽화는 베를린에 전시되어 있다가
2차대전 때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소규모의 작품을 빼고 대형작품들은 그대로 있다가
연합군의 폭격에 모조리 파손되어 그 후 두고두고 중국의 지탄을 받게 된다(독일의 인도미술관 관장인 헤르텔 박사는 40%가 파괴되었다고 주장함).
중국에서 지탄을 받고 있는 영국의 스타인 조차도
이 곳에 와서 독일의 르콕교수가 행한 발굴 행위를 비난했을 정도로
이 곳의 훼손 행위는 마구잡이식 이었던 것 같다.
8월 14일(월) : 투루판(교하고성, 카레즈, 소공탑, 포도농장)
고려촌에서 점심을 오랜만에 제대로 된 김치와 삼겹살로 상추에 된장 찍어
한 입씩 넣어 우물우물 씹어 삼키고 나오니 힘이 좀 난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였다.
이어서 지금까지 본 곳 보다 해발이 더 낮은 교하고성으로 향했다.
투루판 시내는 해발 60m, 화염산은 산이니 더 높았을 것이고
교하고성은 두갈래 물줄기가 흐르는 사이에 천연적으로 형성된 섬같은 요새로 해발 30m이다.
게다가 시간이 한참 더울 오후3시가 갖 넘었다.
가이드 말이 얼핏 들으니 47도라고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지가 더워봐야 얼마나 덮겠어 하면서
과거 열사의 나라 중동과 세계의 분지라는 펀잡평야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었다.
숨을 들이쉬니 더운 열기가 가슴속 허파꽈리를 압박한다.
땀이 나지만 불어오는 더운 바람에 그나마 증발이 빠르니 오히려 시원하다.
정문인 남문으로 들어서니 입구부터 기괴한 모습이 장관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오히려 고창고성보다는 관리상태가 나은 것 같고
벽의 모양도 오랜세월 물에 침식된 듯한 줄무늬가 보인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고창고성은 벽돌을 쌓아서 조성했고
이곳 교하고성은 지형을 깍아서 조성했다고 한다.
가만히 보니 벽돌을 쌓아서 조성한 흔적이 안 보인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가 걷는 도로나 이 도시의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던 많은 건조물들이 파서 만들었다는 말인가?
엄청난 일이 아닐수 없다.
한번 생각을 해 보자, 집을 지을 때 벽돌을 쌓아서 올리는 것하고
흙을 파내서 공간을 만드는 것하고 어느 것이 쉬운지를.... 아마 10배 이상 힘들었을텐데..
아니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 ? 그래서 이 곳이 난공불락이었을까?
전에 읽은 글에서 난공불락의 요새를 징기스칸 군이 공략을 하는데
공격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성문 입구에 흙을 쌓아서 성을 봉쇄하고
몇 개월을 고립시켜 굶겨서 승리를 했는데
성안의 장군이 가족들을 다 죽이고 재물을 우물속에 숨기고 자결을 했는데
나중에 아무리 찾아도 그 재물을 찾을 수 없었다는 내용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여기가 아닌가 싶다.(실제로는 카라호토의 흑성자의 유적에 관련된 내용임)
교하고성을 둘러보고 나오니 다들 그늘에 앉아 한 숨 돌리고 있다.
신강성 안내 책자가 있어 120위안 달라는 것을 100위안으로 깍아서 한 권 사고
인민폐가 없어서 달러화를 받느냐고 물으니 받는단다.
800위안으로 쳐서 계산하고 나니 또 목거리나 팔찌를 사라고 꼬신다.
거스름돈을 봤으니 당연히 그러겠지 하면서 구경을 하는데
터키석으로 된 목걸이를 800위안 받던건데 250위안 달란다.
집사람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2개에 200위안을 불렀는데 안된다고 해서 나오는데 다시 흥정을 하잔다.
집사람이 200도 비싸다고 해서 150으로 내렸는데 실갱이를 하다가 결정을 했는데 나중에 집사람이 1개만 사잔다.
어쩔수 없이 설득해서 1개에 75위안에 사고 나오니 그늘밑에서는 과일 잔치가 열렸다.
시원한 그늘에 앉아 과일 한 입 덥썩 물으니 신선이 안 부럽다.
그래 이 맛에 여행하는 거지...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이번에는 카레즈 박물관으로 향했다.
카레즈는 만리장성, 남북대운하와 더불어 중국 3대 불가사의중의 하나로
멀리 천산에서부터 물을 끌어오는데 지상으로 오면 워낙 증발량이 많아서
지하로 수로를 파서 물을 부근의 오아시스에 공급하는데 이 물을 이용해서 포도농사 등을 짓는다고 한다.
카레즈의 총 길이는 약 5,000Km 이고 한 갈래의 길이가 수Km에서 수십Km까지 되는데
가이드 설명으로는 3인 1조로 작업을 하는데 한개의 수로를 파는데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기도 했단다.
5,000Km의 지하 물길이라니 정말 경이가 아닐 수 없다.
지하에서 사진을 여러장을 찍었으나 먼지입자로 인해 사진이 깨끗한 것이 없다.
저녁 6시 반경 다시 버스에 올라 소공탑으로 향했다.
소공탑은 청나라 때인 1778년 이 지역을 통치했던 봉건왕이
청나라 황제를 위하여 이 탑을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높이 37m, 하단부 직경이 10m로 신강위구르자치구에서 고대 이슬람 구조물로서는 제일 큰 탑이다.
위구르 건축가 이브라인에 의해서 건축된 이 탑은 내부에 꼭대기로 올라가는 72개의 나선형 층을 가지고 있으며
10개 이상의 기하학적 문양이 들어간 벽돌을 사용해서 대표적인 위구르 예술로 꼽히고 있다.
소공탑 관광을 마치고 나니 입구에 상가가 잘 발달되어 있어서
몇가지 구경을 하는데 별로 눈에 띠는 것이 안 보인다.
버스가 안 보여서 어슬렁 거리다 보니 버스 한 대에 많은 분들이 타고 있는 것이 눈에 띤다.
알고 보니 아까 교하고성을 관광하고 나서 한 분이 몸이 불편해서 버스 한 대를 이용해서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하기야 이 땡볕에 그렇게 관광을 했으니 나이드신 분들은 많이 힘 들겠다 싶다.
7시 30분에 출발 이번에는 포도농장으로 향했다.
8시 10분경 인근에 있는 포도농장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시원한 수박과 하미과로 목을 축이고
뒤이어 나온 포도와 건포도 그리고 특별히 나온 포도주를 한 잔씩 하는데
포도주가 당도가 높아서 달착지근한게 꼭 아이스와인을 먹는 것 같다.
한 잔씩 따라주는 포도주가 감질나서 어느 분이 병을 놓고 가라고 하니 또 놓고 간다.
그래서 몇 잔씩 마셨는데 너무 달아서 샴페인처럼 밍밍한 것이 내 입맛에는 안 맞는다.
잠시후 현지인 계집아이 둘이 나와서 현지춤을 추는데 이 곳에서는 외부 손님이 오면 일상적인가 보다.
그리고 이 곳에서 판매하는 건포도가 시장에서 속아서 사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에 모두가 건포도를 사는데
제일 비싼 것이 한약재로 쓴다고 하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고 400위안/Kg이라고 하고
그 다음이 뭐 남자향, 여자향이라고 한 것 같은데 180위안/Kg,
그 다음이 150위안짜리를 깍아서 110위안에 파는 것이 있었는데
집사람과 맛을 보면서 줏어 먹은 것이 100g 은 넘는것 같다.
우리는 110위안/Kg 짜리를 1Kg을 샀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봉지가 2~3개는 되는 것을 보니 많이들 사는 것 같다.
포도주는 한 병에 100위안이라고 하는데 비싼 것 같다.
나중에 시장에서 물어보니 제일 좋은 것이 70위안 정도면 산다고 한다.
포도농장 구경을 마치고 이동한 곳은 투루판 시내에 있는 커다란 음식점으로 이동했는데
우리가 그동안 여행하면서 걷은 돈과 낸 벌금 비슷한 것을 가지고 양 2마리를 잡아서 바베큐파티를 한단다.
그런데 아까 포도농장에서 더운날씨 때문에 마구잡이로 줏어먹은 과일과 건포도로 인하여
배가 거의 차 있는 것이 아닌가?
이쁜 위구르 아가씨와 젊은 총각들이 추는 춤을 보면서 꽉찬 배에 다시 맥주와 바베큐를 마저 채우니
더운 날씨에 더위먹고, 배부르니 슬슬 졸려오기 시작한다.
잠시 밖에 나와서 시계를 보니 저녁 9시30분이다.
어스름이 깔린 거리가 한 낮의 열기가 어느 정도는 식은 채 한산함을 보이고 있다.
잠시후면 이 자리를 마무리하고 현지에서 보내는 우리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야 할 것이다.
8월 15일(화) : 우루무치
실크로드 여행의 마지막 날이 올랐다.
평소와 같이 변함없이 일찍 일어나 오늘은 마무리 짐을 싸느라고 조금 서둘렀다.
일부 버릴 것 버리고 하니 그동안 조금씩 삿던 것들을 넣어도 대충 마무리 된다.
8시경 마지막 남은 컵라면과 남은 커피믹스를 가지고 지하 식당으로 갔다.
뜨거운 물에 컵라면을 익혀 밥하고 먹으니 오랜만에 입맛이 땡긴다.
역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야! 커피까지 입을 개운하게 하고 올라와 마무리 짐을 꾸렸다.
9시가 조금 넘어 버스는 출발했다.
양쪽에 수양버들처럼 늘어진 이름모를 가로수가 도로 양쪽을 빽빽히 지키고 있고
오전 9시 넘은 시간인데도 투루판의 아침거리는 한산하기만 하다.
시가지를 조금 벗어나자 도매시장 같은 곳인거 같은데 유원역에서 봤던 봉고형 삼륜차가 아니라
짐차형 삼륜차가 많이 눈에 띤다.
역시 어딜가나 시장엘 가야 사람사는 모습이 보인다.
9시 50분 이윽고 시가지를 벗어나 고속도로 위에 올라서자
길게 뻣은 고속도로가 일직선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고 주변의 광활한 땅이 모습을 드러낸다.
홍산에서 시내로 내려와 실크로드 여행의 첫날 점심을 먹었던 한국음식점으로 갔다.
오후 2시쯤 도착한 그 곳에서 오랜만에 비빔밥으로 식사를 맛있게 하고
다시 우루무치 남서쪽에 위치한 남산목장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에서는 약 1시간 가량 말을 탄다고 한다.
오후 4시경 도착했는데 그 곳 날씨는 약간 서늘했다. 겉옷을 입어도 크게 덥지 않았다.
목동이 전해준 말채찍을 하나씩 들고 말에 올랐는데, 말 채찍을 잃어버리면 안 된단다.
말이나 소나 당나귀나 동물들의 언어는 대체로 비슷한가 보다.
당나귀마차를 탈 때도 마부가 당나귀엉덩이를 때리면서 차, 차 소리를 질렀는데,
말도 발로 몸통을 조이면서 차, 차 하니 속도를 낸다.
조금 숙달이 되니 좀 더 달리고 싶어 차 차를 반복해도
이 놈이 눈치가 빤해 초자인줄 알고 조금 뛰는채 하다가 다시 걷는다.
역시 말 한마리 속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진대,
요즘 물간 생선으로 한여름에 국민을 속일려고 한 것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한 순간 손으로 눈을 가리면 본인은 속일 수 있다지만,
밖의 모두를 무슨 수로 속일 수 있겠는가? 암. 진실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지.
요즘 물이 안 좋아서 노량진 수산시장 가본 적이 오래인데 무슨 물간 생선을 많이도 팔았나 보다.
여기저기 온통 바다이야기 뿐이다.
누군가가 여름휴가 때 바캉스 얘기를 띄워서 그런거라고 자위를 해 본다.
오후5시간 넘어서 현지인들이 안내한 파오에 들어가니 시원한 수박이 먹음직스럽게 준비돼 있다.
대바자르에서의 쇼핑은 대략 9시반부터 시작했는데
우리가 오는 길 옆에 있는 길거리 바자르가 구바자르라고 하고
우리가 쇼핑을 할 이곳은 신바자르라고 하는데 뒷편에 대형 모스크가 있는 것 같고
중앙부가 광장처럼 오픈돼 있었는데 음식박람회가 열린 것처럼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가운데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이 모두 쇼핑 상가였다.
우측으로 들어가 보니 주로 호탄 특산품인 옥이 대부분이고
예부터 유명한 묘안석이나 불루사파이어, 스타루비 등 실크로드 인도쪽의 특산품은 눈에 띄지 않는다.
뒤로 돌아 왼쪽으로 가는데 광장 뒷편을 공연장으로 준비중이었다.
왼쪽은 주로 공예품이나 숄 등이 많았다.
쇼핑을 마치고 다시 광장에 나오니 광장을 사이에 두고 건물과 건물에 밧줄을 걸어놓고 외줄타기를 한다.
광장의 모든 사람들이 공연과 식사 그리고 이런 외줄타기 등을 보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쇼핑을 마친 우리 일행은 모두 부족한 쇼핑 시간을 아쉬워하며
다 같이 우리 일정의 마지막 코스인 발맛사지를 하러 이동했다.
들어가니 피로에 지친 몸을 위로하기 위하여 전신맛사지로 한단다. 으매 좋은거...
전신맛사지후 최종적으로 공항으로 이동해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데
새로 개장한 공항이 업무처리가 너무 느리다.
한참을 기다려 공항내로 들어가자 마자 비행기 이륙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바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두고두고 추억이 될 실크로드를 남기고....
같이 한솥밥 먹고 추억을 만들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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