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쇠의 마실가기

터키 마실가기(5)-앙카라, 샤프란 볼루

마당가에서 2015. 11. 21. 08:15

2015. 9. 10()

오늘 일정은 아침의 교통정체를 피하기 위해 5시에 기상해서 6시에 출발 한국공원을 들러서 샤프란볼루를 관광하고 이스탄불까지 이동할 예정이다.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는 이스탄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앙카라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인구는 4,417,522명이다(2013년 통계).

 

앙카라는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700년까지 히타이트 문명의 지배하에 있었다. 기원전 1,000년경에는 프리기아인들이 이곳에 정착했고, 프리기아의 수도인 고르디움이 현재 앙카라 주의 남서쪽에 위치한 포랏르에 있었다. 앙카라는 고대에 프리기아인들의 풍요한 도시였으나 후에 지진으로 고르디움은 파괴되었다. 미다스의 손 신화로 유명한 미다스 왕이 프리기아의 왕이었다.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의 주권은 페르시아 제국이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이 갖고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고르디움을 통해 앙카라에 입성해서 곧바로 동쪽인 페르시아 일대와,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까지 정복전쟁을 하였고 파키스탄의 물탄 전투에서 가슴에 부상을 당한 알렉산더는 인더스 강과 이란의 사막을 거쳐 페르시아 지역으로 돌아오나 기원전 323년 사망하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사망 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뿔뿔이 나뉘어져서 안티고노스 1세가 앙카라 지역을 차지한다,

 

기원전 300년경에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북동부에 위치한 폰토스가 무역거점으로 삼기위해서 이 지역에 진출했고 앙카라의 이름의 기원이 된 안키라γκυρα, 그리스어로 닻)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그 후 기원전 232년경에는 갈라티아 지방에 정착한 켈트인의 일파인 텍토사게스인들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기원전 189년에는 로마의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가 앙카라를 점령하여 갈라티아인 들에 대한 군사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기원전 63년에는 폼페이우스가 다른 텍토사게스 영토와 함께 한 수장 아래 두어 한동안 자치가 이루어지다가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앙카라를 로마 제국의 갈라티아 주 수도로 삼았다.

 

이때 앙카라의 주민구성은 그리스인, 유대인, 로마인, 로마화된 켈트인들을 포함하고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으나 그리스화 된 헬레니즘 도시가 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기원후 19년경 그리스인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앙카라를 도시가 아니라 요새라고 불러 그리스·로마 도시 수준의 공공시설 등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암시하고 있다.

 

비문이나 주화에 남겨진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당시 앙카라의 문화는 켈트 바탕에 로마의 사상과 관습이 얹힌 형태였다고 여겨진다. 150년경에야 진정한 헬레니즘이 싹트기 시작한다. 기독교가 북쪽이나 서북쪽으로부터 전파된 시기는 이르면 1세기 정도로 생각된다. 하지만 192년 처음 기록이 남아있는 안키라 교회를 사도 바울로가 세웠다는 증거는 없고 그가 갈라티아 북부에 다녀갔다는 증거도 없다. 단지 갈라디아인 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갈라디아교회와 사도 바울로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앙카라의 위상은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제국의 국제 도시가 되고 나서야 가까운 지리조건 덕에 크게 올라갔다. 그 후 중세에도 앙카라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였을 때는 페르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1073년에는 셀주크 튀르크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십자군 원정을 온 툴루즈의 레이몽 4세가 1101년 셀주크 튀르크를 몰아냈으나 비잔틴 제국은 앙카라를 지배할 만한 힘이 없어 그 후 셀주크 튀르크와 다른 경쟁 세력들은 앙카라를 두고 서로 싸웠다.

 

1356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2대 술탄인 오르한 1세가 앙카라를 정복하였다.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가 아나톨리아 원정 때 앙카라를 포위 공격해 1402년 빼앗았다. 그러나 1403년에 앙카라는 다시 오스만의 지배하에 돌아와서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1차 대전의 종반 무렵, 현재의 터키 지방은 오스만 술탄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그리스 군의 침공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터키 민족주의 지도자 케말 파샤(후의 케말 아타튀르크)는 그의 저항운동 본부를 1919년 앙카라에 세웠다(터키 독립전쟁 참조).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고 앙카라가 이스탄불(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신 터키의 수도로 정해졌다.

 

앙카라가 터키 공화국의 수도가 된 이후, 구시가지는 울루스(Ulus), 신시가지는 예니셰히르로 불리게 되었다. 로마시대, 비잔틴시대, 오스만 제국 시대의 유적들과 오래된 시장, 옛 관공서 등은 울루스에, 대로, 신식 호텔, 극장, 쇼핑몰, 신식 관공서, 대사관 등은 크즐라이(Kızılay)를 중심으로 하는 신시가지에 위치하게 됐다. 그 이후, 앙카라는 터키 공화국의 수도로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1924년에는 앙카라의 인구는 35,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1950년에는 286,781명이 사는 도시가 되었고, 2014년에는 5,150,072명의 인구가 사는 대도시가 되었고, 현재 터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됐다.

 

앙카라는 중앙아나톨리아 지역, 즉 내륙에 위치하다보니 대륙성 기후를 띈다. 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날씨가, 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이 온다. 주로 가을과 봄에 비가 내린다. 앙카라는 고지대에 위치하다보니 여름에는 낮에 덥고 건조하지만, 밤에는 시원하다. 연간 강수량은 402mm 이고 1월 평균기온은 0.4°C, 7월 평균기온은 23.6°C이다.

 

역사적으로 앙고라염소 털로 만든 모헤어, 앙고라토끼 털로 만든 앙고라 울을 생산하는 섬유산업이 발달했었다. 또한,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포도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특히, 카바클데레 와인(Kavaklıdere wine)이 유명하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시장은 울루스에 위치한 츠크르크츠라르 요쿠수(Çıkrıkçılar Yokuşu)로 주로 양탄자, 가죽 제품 등을 판매한다. 바클크라르 시장(Bakırcılar Çarşısı)은 장식품, 카펫, 골동품 등으로 유명한 시장이다. 앙카라성 근처에도 향신료, 말린 과일, 견과류 등을 판매하는 시장이 있다. 또한, 스히예 광장 주변에는 매일 전통시장이 열린다.

앙카라에는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공원들이 있다. 울루스에 위치한 겐츨릭 파크(Gençlik Parkı)에는 놀이공원과 호수가 있어서 주말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크즐라이에 위치한 귀벤파크(Güven Park)에는 시미트와 꽃을 파는 행상들이 많이 있으며,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있다. 카바크르레데에 위치한 쿨루 파크(Kuğulu Park)에는 중국 정부에서 선물받은 백조와 흑조, 오리 등이 살고 있다. 알튼 파크(Altın Park)는 넓은 공원과 호수가 있으며, 배를 탈 수 있다. 앙카라 외곽지역인 에르야만에는 야경과 호수가 아름다운 괵수 파크(Göksu Park)가 있다.

 

또한, 앙카라 아레나 주변에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터키 군인을 기리기 위한 한국 공원(Kore Bahçesi)이 있다.

 

겐츨릭 파크는 1952년부터 1976년까지 100 터키 리라의 뒷면에 그려져 있었다. 또한, 시내에 아타튀르크 오르만 치프트리이(Atatürk Orman Çiftliği)라는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농장 일을 하던 농원이 있는데, 이곳에는 동물원과 농장, 레스토랑 등이 있다. 또한, 아타튀르크가 태어난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위치한 생가를 완벽하게 복원해 놓은 집도 있다. 농장인 치프트릭(Çiftlik)에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농장에서 생산되는 치즈, 전통 맥주, 아이스크림 등을 맛볼 수 있으며, 주변에는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있다.

 

앙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양이 품종인 터키시 앙고라(Ankara kedisi)가 살던 지방이다. 터키시 앙고라는 주로 희고, 부드러운 긴 털을 갖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품종 개량을 통해 검은털이나 붉은 털을 가진 터키시 앙고라도 많다. 터키시 앙고라는 페르시안 고양이나 터키시 밴과도 가까운 품종이다. 눈은 파랑색, 녹색, 황색인 경우도 있지만 간혹 한쪽 눈과 다른 쪽 눈의 색이 다른 오드아이도 있다. 귀는 크고 눈은 아몬드 모양으로 생겼다.

 

앙고라 토끼(Ankara tavşanı)는 앙카라 주변에 살던 길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토끼이다. 앙고라 토끼는 가장 오래된 가축용 토끼 중에 하나인데, 중세시대에 프랑스 왕실의 애완용 토끼로 유명하다. 미국에는 20세기 초에 처음으로 도입됐다. 앙고라 토끼는 털인 앙고라 울로 유명한데, 앙고라 울은 희고 길며 가벼워서 의복 재료에 많이 쓰인다.

 

앙고라 토끼를 사육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앙고라 울을 얻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앙고라 토끼는 온순하지만, 주의 깊게 다뤄주어야 한다. 여름에는 털을 짧게 깎기도 하는데, 긴 털 때문에 여름에 열사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위키백과)


아침시간에 방문한 한국공원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바깥쪽의 담당에 태극기와 터키 국기가 나란히 표시되어 있다. 아타튀르크의 묘가 지나가는 길에 스쳐 보인다.


6시경에 호텔을 출발한 우리는 오전 920분경 샤프란볼루에 들어올 수 있었다. 차에서 바라본 샤프란볼루는 조용하고 깨끗한 인상을 준다. 1994년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터키 전통가옥과 옛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샤프란볼루는 오스만 제국의 주택을 만날 수 있는데 터키 서북부 카라뷔크주에 위치한 이곳은 염색재 및 향신료 등으로 쓰였던 샤프란 꽃의 군락지여서 이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스탄불에서 4시간30분 정도 소요된다.

 



  샤프란볼루 골목을 걸으면서 누가 놀라게 했나보다, 저렇게 깜짝 놀라 돌아서서 웃는 것을 보니..


계단식으로 경사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샤프란볼루의 오래된 가옥은 모두 오스만 제국의 주택들로 백도제를 바른 벽과 붉은 타일 지붕이 인상적이다. 터키 정부는 일부 가옥을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있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19세기 육군 중령의 가옥인 카이마카믈라 저택이 대표적이다. 뭄타즐라 저택도 관광객이 자주 찾는 곳. 이 밖에 가옥들은 현지인이 거주하고 있는 곳도 있으며 카페와 레스토랑, 호텔 등으로 변신한 곳이 많다.


전통 가옥을 둘러보는 것 외에도 샤프란볼루에서는 여전히 전통을 잇고 있는 공예가들과 농부들 모습에서 터키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오전 10시경 샤프란볼루를 출발한 우리는 12시 반경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130분 다시 이스탄불을 향해 출발했다.




오후 520분경이 되자 저 멀리 마르마라해가 보이기 시작한다. 도심으로 가까워질수록 퇴근길의 교통정체는 더욱 심해진다. 겨우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왔는데 그랜드 바자르 근처에서는 교통정체가 너무 심해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그랜드 바자르로 향한다.


610분 약 5000여개의 재래식 상점들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그랜드 바자르에 도착했다. 사방에 출입문이 22개나 있다는 그랜드 바자르는 구시가지에 위치한 터키 최대의 재래시장으로 1461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터키어로는 카팔르 차르쉬라고 하는데 지붕이 있는 시장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온갖 물산이 넘나들던 교역의 중심지다. 그런데 7시에 문을 닫는단다. 부지런히 보고 건너편 게이트에서 7시에 가이드가 만나잔다. 그래 바쁘지만 가보자....


물건 값은 확실히 그랜드 바자르가 싼데, 깍는 것을 확실하게 깍아야 바가지를 쓰지 않는다. 최소 50%에서 최대 60% 이상 할인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랜드 바자르 입구에서

 

마당쇠도 한 장




 


 

달밤에 바닷가에 가자고 해서 나왔는데 괜히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바람에 거의 2시간을 헤매다 왔다. 얼굴이 달밤에 상기해있다...ㅋㅋㅋ

 

그리고 달밤에 시원한 에페스 맥주 한잔(크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