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쇠의 마실가기

플라워 파워 콘서트

마당가에서 2008. 5. 9. 14:25

2008. 5. 4(일) : 플라워 파워 콘서트 관람기

 

모처럼 연휴를 맞아 집에 왔지만 집에 있을 시간이 별로 없다. 친구들과 운동을 위해 어제 도고에 내려와서 운동 한게임을 하고 저녁에 소주를 한 잔 걸친 다음 모처럼 한 30년 전쯤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 아침 해장국 내기 쓰리쿠션 당구를 치느라고 새벽 1시까지 놀다가 늦게 잠이 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약속한 시간에 눈을 떳다.

 

당진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올라가다가 해장국을 먹고 다시 도고CC에서 운동을 하는데 저녁에 집사람하고 플라워 파워 콘서트를 보러가기로 했기 때문에 올라가는 길이 차가 막힐지 몰라서 걱정이다.

운동을 끝내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시간이 오후 3시경 다행히 서해안고속도로가 막히지는 않는 모양이다.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부리나케 집으로 올라오니 4시반경이다. 주최측에 연락을 하니 때마침 야구경기가 동시에 벌어지기 때문에 주차장이 복잡할 수 있으니 대중교통으로 오란다.

 

플라워 파워 콘서트는 월남전 당시 전장으로 떠나는 남편과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여자분들이 머리에 꽃을 꽂은데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1969년 처음으로 평화와 사랑을 기원하는 이 플라워 파워 콘서트가 개최되었다고 한다.

 

강원도와 강원민방이 주최하는 이 콘서트는 그로부터 약 40년이 흐른 후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인 이 곳 한국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그 옛날 학창시절 라디오와 레코드로만 들을 수 있었던 그야말로 전설을 눈으로 직접보게 된 것이다.

 

어쩌면 다시는 못볼 콘서트가 아닌가?...... 기대가 된다.

 

잠실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조금 넘었는데 많은 사람들로 어수선하다. 한 쪽에서는 팜플렛을 배부하고, 비가 올까봐 비닐 비옷을 나누어 주고, 또 VIP 고객에게는 티셔츠도 한 개씩 나누어 준다.

 

한참을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이윽고 들어가자  DJ 김광한씨의 사회로 국내 가수들의 축하공연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김세환씨는 벌써 끝나고 갔다고 하고 "그대 그리고 나"라는 노래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입장하는 관객들의 움직임과 대화로 다소 소란스러웠지만 운동장을 꽝꽝 울리는 노랫소리는 정말 좋았다.

 

열창하는 소리새(?)

 

넓은 잠실운동장에는 비닐 비옷을 뒤집어 쓴 관객들이 앉아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님과 마당쇠

 

흥을 돋우기 위해 애쓰는 DJ 김광한

 

아래 내용은 퍼온 글이다.

Brothers Four가 결성된 것은 1958년입니다. 미국 워싱턴대학의 학교 동호회 축제기간에 네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 드럼없이, 베이스와 기타 , 벤조, 봉고, 심벌같은 악기로 함께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대학내의 같은 서클에 가입하는것에 의미를 두고 ‘형제’라는 뜻으로 Brothers four라는 팀 이름을 지었다. 처음에는 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했다가 본격적으로 클럽 공연에 나서게 되었는데 마침, 유명 가수의 매니저가 Brothers four 의 노래를 듣고 1959년 말에 정식으로 개인 매니저로 계약을 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곧바로 유명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1960년 2월에 싱글 레코드를 발매하게 되었다.

그곡이 바로 Green Fields 라는 곡으로 Brothers four 의 첫번째 발표 싱글이자 최대의 히트곡이다 Brothers four 는 남성 4인조의 중창단으로 정서적인 화음이 이들의 대단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Brothers four의 성공은 당연히 우리나라 가요계에도 영향을 가져왔다. 우리나라에서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활동하던 ‘블루벨스’나 ‘봉봉 사중창단’ ‘별셋’ 같은 팀이 인기를 얻었던 기본이 되기도 했다.

Brothers four 는 아카펠라 그룹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연주를 하며 환상적인 남성 화음으로 중후하면서도 감미로운 음악세계를 펼쳤던 그룹이다.

 

'Green Field' '500miles' 등의 Brothers Four

 

원래 이름은? 'Dr. Hook and the Medicine Show'였다.1968년 뉴저지(New Jersey)에서 결성된 이 밴드의 오리지널 멤버는 레이 소여(Ray Sawyer)와 데니스 로커리어(Dennis Locorriere), 빌 프랜시스(Bill Francis), 존 데이비드(John David),그리고 조지 커밍스(George Cummings)였다.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글로 처음 알려지게되면서 광기 어린 무대 매너로 주목을 받다가, 마침내 1972년 'The Cover of Rolling Stone'의 대히트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앨범에 담아내어 70년대 내내 숱한 발라드 곡들로 차트를 장식했다. 레이 소여는 최근까지도 닥터 훅의 곡들을 각기 다른 버전으로 내놓고 있다.1973년도의 [Freakin' at the Freakers Ball] 앨범에서 실버스타인의 후원을 받은 이후, 닥터 훅은 [Belly Up] 앨범에서부터 그들의 자작곡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곧 파산 지경에 이르렀고,콜럼비아 레코드사로부터 해고당했다.그 후 1975년에 그들은 캐피탈 레코드사와 다시 계약을 맺게 된다.적절한 표제가 붙여진 캐피탈 레코드사에서의 첫 앨범인 [Ba-nkrupt]로 부터는 샘 쿡의 'only Si-xteen'을 가느다란 목소리로 다시 부른 것이 대 히트 싱글로 되어 나왔다.

Dr.Hook 

 

Dr.Hook  

 

Dr.Hook  

 

1939년 5월1일 시애틀 출생, 60년대 초 아메리칸 포크음악의 부활과 더불어 최고의 포크가수로 떠오른 주디 콜린스(Judy Collins)는 맑고 청순한 소프라노 목소리를 자랑하며 약 40여 년 동안 팝 계에 군림하고 있는 여성 아티스트이다. 클래식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던 주디는 어린 시절 전통적인 포크 음악에 매력을 느끼고 도심지의 클럽가에서 노래를 부르며 대중음악가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61년 일렉트라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은 그녀는 첫 앨범 [A Maid of Constant Sorrow]를 발표하고 이어서 [The golden Apples of the Sun]을 발표한다. 두 앨범에서 직접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며 깨끗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정통 포크 음악을 들려주었던 그녀는 세 번째 앨범 [Judy Collins #3]부터 컨템포러리 음악 스타일을 받아들여 밥 딜런(Bob Dylan)의 'Farewell', 짐 맥귄(Jim McGuinn)의 'The Bells of Rhymney', 'Turn, Turn, Turn'을 비롯해 여러 뮤지션들의 곡을 받아 음악영역을 넓혀갔다. 66년 [In My life]로 당시만 해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작곡가 레오나드 코헨(Leonard Cohen)을 비롯한 다수 작곡가들의 음악을 섭렵하며 보헤미안의 자유분방한 스타일을 자신의 음악에 융화시킨 주디 는, 이듬해 현악 편곡 앨범인 [Wildflowers]를 발표, 'Both Sides Now'를 히트 시키며 첫 골드 앨범의 영광을 안았다. 자수정의 빛깔을 소리에 비유한다면 바로 주디 콜린스의 목소리일 것이라는 리차드 페리나(Richard Farina)의 비유와, 뉴욕 타임즈의 '은색의 액체와도 같은 목소리(voice of liquid silver)'라는 찬사가 결코 과장이 아닌 탁월한 음성의 주디 콜린스는 포크계의 디바로 팝 음악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1951년 1월 9일 켄터키 주에서 브렌다 개일 웹(Brenda Gail Webb)의 이름으로 태어난 크리스탈 게일의 친언니는 컨트리 음악계의 살아있는 전설 로레타 린(Loretta Lynn)이다.
이것은 아마추어시기에 그녀에겐 약이 되었지만 프로 가수가 되려는 그녀에겐 병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1970년대 초반에 만난 제작자 알렌 레이놀즈(Allen Reynolds)와 함께 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드럽고 여성 스런 이미지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긴 생머리를 길렀으며 항상 방긋 웃는 사진을 고집했지만 진짜 문제는 음악이었다.
언니 로레타 린이 전설로서 생존해 있기에 그 벽을 뚫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정통 컨트리가 아닌 컨트리 팝 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녀의 이러한 변신은 대 성공이었다. 특히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Half the way (15위)'를 비롯해 'Don't it make my brown eyes blue (2위)', 'Talking in your sleep(18위)', 그리고 컨트리팝 싱어 에디 레빗(Eddie Rabbitt)과 앙상블을 이룬 'You and I(7위)' 등을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양산했다. 그녀의 수정처럼 맑고 푸근한 목소리는 팝과 컨트리, 어덜트 컨템포러리, 그리고 소프트 팝을 고루 소화하면서 어느 한 장르에 차우침없이 균형을 이루는데 적격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컨트리팝 가수들은 1980년대 말에 등장한 신 전통주의 컨트리 싱어들에 의해 밀려났고, 미모의 크리스탈 게일도 예외일 순 없었다. 1990년대부터는 음반 제작보다 순회 공연에 더 집중적인 활동을 보이고 있다.  

 

열창중인 크리스탈 게일

 

어두워서 너무 흔들리기 때문에 Manual Mode로 셔터속도를 빨리해서 조금 어둡다.

 

조명발을 받으니 조금 낫네

 

 

 

 

"돈 맥클린"은 미국 출신 싱어송 라이터로 오랜 기간 무명의 설움을 겪었던 그는 앨범 [American Pie]로 1972년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기록하며 스타덤에 올랐는데, 이 앨범에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세계를 흠모해 발표한 노래 "Vincent"가 담겨있다.1972년 빌보드 싱글 차트 12위에 오른 이 곡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작품에서 곡에 대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시적인 노래 가사와 감미로운 선율에 회화성이 곁들여져 국내에서 크게 히트를 쳤다. 이 곡을 부르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서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이라는 유명한 곡이 탄생 되기도 했다.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은 1972년 당시 무명가수이던 "롤리 리버맨"이 부른 노래가 원곡이며 비행기에서 이 노래를 우연히 듣게된 "로버타 플랙"이 곡에 매료되어 리메이크를 했다. "롤리 리버맨"은 클럽에서 "Vincent"를 노래하는 "돈 맥클린"을 보고 매료되어서 그때의 감동을 작곡가에게 이야기하면서 만들어진 곡으로 알려져 있으며, 노래의 제목에서도 알수있듯이 "돈 맥클린"의 노래에 대한 찬사로 이어지는 곡이다.

1945년 10월 2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돈 맥클린"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부터 다운타운가의 포크 싱어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미국 허드슨 강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허드슨 리버 스펜서(Hurdson River Spencer)"라는 50인조 캠페인 그룹을 만들어 허드슨 강을 따라 보트 여행을 하면서 노래를 불러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한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Songs And Sdetches Of Clear Water Crew"라는 책을 발간 하기도 했다.

타이틀 곡 "American Pie"는 1972년 초에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기록했고 "Vincent"도 히트를 쳤다. 1972년 앨범 [Don McLean]을 발표하면서 "Daniel", "The Pride Parade"를 히트시키기도 했는데, 1973년에는 데뷔 앨범에 들어 있는 "And I Love You So"가 "페리 코모"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히트를 치기도 했다.국내에서는 1980년대에 발표된 "Crying"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열창중인  돈 맥크린

 

정말 프로다웠던 돈 맥클린 

 

 

임시로 설치한 무대위로 비가 쏟아지자 전자장비에 물이 들어가 스피커에서 펑펑하는 잡음도 들리기 시작했고 주변의 기기에 비닐을 덮어서 보호를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연주를 중단할 만큼 물이 많이 새서 옆의 밴드가 돈 맥클린을 쳐다보는 모습이 연주 중단을 종용할 만큼 상황이 나빳지만 돈은 끝까지 동요하지 않고 빗속에 모든 공연을 마치고 퇴장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고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 빗속에 돈을 열광적으로 응원했다.

 

그 이후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멜라니는 무대속에 또 다시 천막을 치는 해프닝이 있은 후 등장했다.

무대속에 천막친 것은 아마도 전무후무하리라.

 

 

1974년 뉴욕주의 퀸즈 태생. 여성 포크싱어인 Melanie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성장하면서 그녀는 밥 딜런이나 피트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음악 뿐만 아니라 연극에도 흥미를 가져 연극공부도 하였다. 이러한 계기로 남편인 피터 세커릭을 만나게 되었고 1969년에 그녀는 부다 레코드사와 계약하여 Born To be 라는 데뷔 앨범을 발표하였다. 그녀는 포크 뮤지션의 요람인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활동하다가 67년에 첫 싱클 앨범 ‘Beautiful people 을 발표하면서 데뷔 하였다. Melanies는 여성 포크 싱어송 라이터로 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의 많은 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여성들에게 제일 인기가 좋았던 팝 아티스트이다.

거물 포크스타 밥딜런이나 조안 바에즈 등의 명성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그녀는 동시대를 풍미했던 거물 아티스트이다. 그녀의 ‘Saddest thing’ 은 1973년 작품으로 미국의 인기챠트와 관계없이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곡으로 국내 매스컴에서 ‘가장 동양적이고 한국인들 정서에 맞는 슬픈 곡’의 대표적이 곡이라 할 만큼 지금도 노래의 인기는 여전하다.

더욱이 세계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멜라니의 음성과 그녀의 동양적인 취향이 그런곡의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1972년에 그녀는 남편과 함께 Neighborhood라는 음반사를 설립하였고 1975년까지 계속 음반을 발표하였다.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지금도 사랑받는 The Saddest Thing, Lay down Ruby Tuesday, Brand New Key 등이 있다. 

 

아들과 같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멜라니

 

중간에 통역과 같이 분위기를 돋우는 멜라니

 

옆에서 코러스를 하는 두 딸도 즐거워 웃고.....

 

 

 

 

 

모든 공연이 끝나고 나오니 12시 반경이다. 차를 놓고 와서 전철역에 들어가니 전철은 끊어졌단다.

모든 사람이 택시를 잡으려고 기다리니 택시타기도 쉽지가 않다.

때마침 공항가는 공항버스가 오길래 무조건 타고 집 근처로 가기로 했는데, 인공폭포 지나서 내려서 일행들과 함께 실내포장마차로 들어갔다. 늦은 새벽시간에 소주 한 잔하고 카 하니 기분이 좋다. 마님의 얼굴도 좋아보인다. 그래 마당쇠는 이 맛에 사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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